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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인공지능(AI) 판사와 로봇 변호사의 시대

입력
2020.05.06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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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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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의 확산과 인공지능의 발달을 다룬 한 TV프로그램에서 ‘리버스 싱귤래리티(Reverse Singularity)’라는 용어가 소개되었다. 원래 ‘싱귤래리티(Singularity)’라는 말은 기계가 진화하여 인간의 지성을 추월하는 시점을 의미하는데 ‘리버스 싱귤래리티’란 그런 시점이 기계가 똑똑해져서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의 단순성을 닮아가는 방향으로 퇴보해서 도래하는 것을 뜻한다. 소셜미디어의 확산과 더불어 인간들이 마치 로봇처럼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으로 반복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로 퇴보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바로 ‘리버스 싱귤래리티’라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발전해서 인간의 지성을 대체하는 것도 두려운 일인데 인간이 퇴보해서 인공지능에 의해 추월당한다니 참으로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실제 우리 법조계에서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법조 실무 현장에서 로봇을 닮은 변호사, 인공지능을 닮은 판사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신참 변호사들은 어떠한 사건을 접하면 각종 판례검색 시스템을 통해서 그 사건과 가장 비슷한 사건을 찾는 일을 먼저 한다. 사실 이 세상에 비슷한 사건은 있을 수 있지만 똑같은 사건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사실관계가 다르고 재판 과정에서 제시된 주장도 다르며 판사의 성향도 다르다. 따라서 사실(facts)을 깊이 조사하고 법리를 깊이 있게 연구하며 판사의 성향을 고려하여 최선의 주장과 설득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비슷한 판례를 찾으면 그 판례가 내린 결론, 논리에 포섭되어 더 이상 창의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판례가 점점 더 많이 집적되고 그러한 판례를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이 더 발달됨에 따라 판사들이 기존의 판례에 따라 마치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처럼 기계적인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경향에는 큰 문제가 있다. 어느 판사의 편견에서 비롯된 잘못된 판결이 다른 사안에 인용되어 고착화될 수도 있고, 특별한 상황에서만 정당화되는 논리가 마치 보편적인 법리인 양 굳어질 수도 있다. 판례가 없는 사건에서는 심급을 오가며 우왕좌왕하는 판결이 내려질 수도 있다. 어설픈 인공지능 법조인을 양성하는 주범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의 변호사시험제도다.

변호사시험 선택형 문제에 거의 빠짐없이 붙는 문구가 있다. ‘다툼이 있는 경우 판례에 의함’이라는 문구다. 대부분의 변호사시험 문제들이 기존 판례의 사안을 간략히 설명한 후 결론을 묻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로스쿨에서는 학생들에게 판례의 결론을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고, 학생들도 방대한 판례를 결론만 외우는 것에 골몰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변호사시험은 ‘Black letter law’라고 하는 핵심적인 법리를 이해하는지 테스트하는 데 중점을 두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방대한 판례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하고 있으니 판례법 국가인 미국보다 성문법 국가인 우리나라가 오히려 판례를 더 신봉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법학교육은 판례의 결론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중요 판례들을 선별하여 그러한 판례가 형성되게 된 배경과 의미,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이어서 우리나라의 판례 교육과는 전혀 그 결이 다르다.

이대로 가다간 성능이 떨어지는 인공지능 법률가, 창의력을 상실한 법률 로봇들이 가득한 법조계가 될까 두렵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유능하고 유연한 법조인을 배출하려면 무엇보다도 변호사시험에서 다루는 판례의 양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 로스쿨도 단순 암기식 판례공부 대신 기초 법리를 깊이 있게 다루는 전통적인 법학 교육과 실제 사건을 다루는 임상 법학 등 경험적 법학 교육을 조화롭게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주영 변호사ㆍ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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