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새니얼 호손의 ‘큰바위 얼굴’ 의 모티브가 된 뉴햄프셔 주 캐넌마운틴 화강암 벽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지만, 한국만 해도 거북이나 곰처럼 생긴 바위는 흔하다. 그럴싸한 전설로 신성시되는 것도 있다. 비 갠 뒤 청명한 하늘의 구름 조각에서 토끼나 독수리의 형상이 나타나고, 그을린 나무나 옷감 조각이 천사의 얼굴을 드러낼 때도 있다. 고대 인류는 밤 하늘 별들을 이어 백조와 큰곰을 그렸고, 보름달 그림자에서도 항아(姮娥)나 떡방아 찧는 토끼를 연상했다.
인문학자 김우창(1937~)은 동양화 미학서 ‘풍경과 마음’에서 “색채와 일정한 윤곽을 그리는 선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그림에서도 “사람은(…) 실제적인 사물을 읽어 내려는 강박적 성향”을 지녔는데, 그건 “어떤 경우에나 사람의 시각 체험은 일정하게 조직화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것은 단순한 질서를 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질서는 다시 사물의 세계를 향한다.” 그렇게 사물에서 사람(의 뇌)으로, 다시 사물로 연역되고 귀납되는 ‘형이상학적 본능’을 그는 일종의 창조적 매트릭스라고, 구체와 추상의 그림을, 사유를, 푸코가 말한 ‘에피스테메의 체제’를 형성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짐작했다.
그런 경향이 무해할 만큼 상식의 궤도를 적당히 벗어나면 전위적이고 도전적인 예술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지나칠 경우 신경증으로 전이된다. 꼭 병증이 아니더라도, 우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도박사나,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는 몽상가, 미신이나 터부에 확신을 품고 사는 운동선수들도 흔하다. 성공과 명예에 목마른 과학자 중에도 부실한 실험 데이터를 근거로 섣불리 가설을 이론화했다가 망신당하는 이들이 있고, 오진하는 의사들도 있다.
나치 당원이었던 독일 신경심리학자 클라우스 콘라드(Klaus Conrad, 1905.6.19~ 1961,5.5)는 1958년 그런 현상을 정신분열증의 전 단계인 ‘아포페니아(Apophenia)’라고 명명했다. 유쾌한 상상과 경박한 실수, 병증의 경계는 결코 뚜렷하지 않다. 망상과 창조의 경계 역시 있긴 하겠지만, 동양 수묵화나 서양의 수채화처럼 흐릿한 점이지대 위에 해안선처럼 움직이며 존재할 것이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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