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스튜디오 유니버설은 지난달 10일 애니메이션 ‘트롤: 월드 투어’(트롤2)를 극장 개봉과 동시에 주문형비디오(VOD)로 선보였다. 말이 동시 공개이지 VOD로만 출시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미국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3월 16일부터 자동차 극장을 제외하고 극장 대부분이 문을 닫고 있다. 미국 극장들은 유니버설의 행보에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개봉 연기 대신 VOD 출시를 택한 ‘트롤2’가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미국 주요 영화사들은 극장의 수익 극대화를 위해 극장 상영 90일이 지나야 영화 VOD를 출시하는 시장 규칙을 준수해 왔다.
고육지책이었던 유니버설의 전략은 성공했다. ‘트롤2’는 출시 3주 만에 VOD 매출 1억달러를 돌파했다. 1편의 극장 매출 1억5,370만달러(5개월 상영)에는 미치지 못하나 수익은 더 짭짤하다. VOD는 매출을 반반씩 나누는 극장과 달리 영화사가 80%를 가져간다. 유니버설은 VOD로만 8,000만달러 넘게 챙기며 1편의 극장 수익(약 7,680만달러)을 이미 뛰어넘었다. 유니버설의 모회사는 컴캐스트다. 세계 최대 케이블 방송국이자 미국 최대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다. ‘트롤2’의 흥행 성공에는 컴캐스트의 후광이 작용했다.
‘게임의 법칙’이 영영 바뀔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일까. 지난달 28일 미국 최대 극장 체인 AMC는 앞으로 유니버설의 영화들을 상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메아리 없는 으름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영화사들은 오래 전부터 극장 의무 상영 기간을 족쇄로 여겨왔다. 코로나19는 족쇄를 풀, 더 할 나위 없는 명분이다.
사회 각 분야가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들 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게임의 법칙이 대폭 수정되고, 산업 질서도 크게 바뀔 전망이다.
지난달 26일 미국 경제전문 매체 포브스는 엔터테인먼트 관련 회사들을 네 단계(Tier)로 나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내다봤다. 상위 1단계에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넷플릭스와 아마존이 올랐다. 코로나19로 경영 위기를 겪기는커녕 되레 호황을 누리는 대표적인 ‘언택트’ 업체들이다. 2단계에는 코로나19 불황의 영향을 덜 받는 애플 같은 회사가 포함됐다. 3단계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와 유니버설 등이 해당됐다. 영화 등 콘텐츠를 제작하고 OTT 사업을 하면서도 테마마크 등을 지닌 회사들이다. 코로나19라는 직격탄을 맞았으면서도 일부 사업에서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맨 아래 4단계는 AMC 같은 극장 체인이나 라이온스게이트 같은 소규모 스튜디오다. 코로나19로 파산 위기에 처한 곳들이다. 코로나19라는 불확실성이 걷히면 상위 단계 회사들이 인수합병(M&A) 등을 위해 하위 단계 회사들에 눈독을 들일 것이다. 예컨대 넷플릭스가 AMC를 인수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코로나19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이 앞으로 펼쳐질 가능성은 매우 커졌다.
‘뉴노멀(New Normal)’의 징후는 코로나19 이전부터 엿보였다. OTT가 극장 대체재 역할을 하면서 영화 제작은 블록버스터 위주로 빠르게 재편되는 중이었다. 코로나19라는 변수가 더해진 상황에서 영화사들과 극장은 관객의 발길을 붙들기 위해 스타 감독이 연출하고, 스타 배우가 대거 출연하는 블록버스터에 더 몰두할 수 밖에 없다. 신인 감독이나 신인 배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는 더더욱 어려워지게 됐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가 흥행 실패하고도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을 만들 수 있었던 봉준호 감독의 사례는 그저 과거에나 있었던 일이 될 공산이 크다.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두기만 해도 될까. 산업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선 재능 있는 약자 보호가 필요하다. 영화산업의 풀뿌리인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등 작은 영화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상영돼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긴급 자금 지원을 넘어 코로나19 이후를 대비하는 영상 정책을 고민해야 할 때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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