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Why] 방송가는 왜 트로트에 빠졌나
영화 ‘복면달호’(2007)에서 주인공 봉달호(차태현 분)는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는 것이 창피해 복면을 쓰고 방송에 나갑니다. 달호는 반짝이 의상과 2대8 가르마 등으로 한껏 정통 트로트 분위기를 살려 웃음을 자아냈죠.
이토록 촌스럽게 여겨지던 트로트의 위상이 달라졌습니다. 임영웅, 영탁, 송가인 등 차세대 트로트 스타들이 세련된 매력으로 방송가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음악 프로그램은 물론 예능 프로그램, 광고까지 분야를 넘나들며 그야말로 ‘트로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어요.
우리는 앞서 트로트에 한껏 취한 경험이 있습니다. 2004년 가수 장윤정이 ‘어머나’를 발표한 이후 2009년 홍진영 ‘사랑의 배터리’ 박현빈 ‘샤방샤방’ 등 ‘세미 트로트’가 젊은 층의 인기를 끌었죠. 이후 한동안 잠잠했었는데, 최근 다시 주류 문화로 우뚝 선 겁니다. 왜일까요.
◇ ‘어머나’ 이후 16년… 무엇이 달라졌나
선두는 단연 TV조선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입니다. 최고시청률 35.7%(닐슨코리아 기준)을 기록하며 흥행한 후 출연자들은 공중파까지 진출했죠. MBC ‘라디오스타’ JTBC ‘뭉쳐야 찬다’ 등 몇몇 프로그램은 트로트 특집으로 이들을 내세워 시청률이 껑충 뛰기도 했답니다.
트로트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은 여러 변주가 눈에 띕니다. SBS ‘트롯신이 떴다’는 국내 최정상 트로트 가수들이 해외에 ‘K-트롯’을 전파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TV조선 ‘사랑의 콜센타’는 ‘미스터트롯’ 출연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신청곡을 받아 노래를 불러주는 내용으로 큰 호응을 얻고 있죠. 최근 종영한 MBC 에브리원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서는 7명의 트로트 가수가 무대 경연을 펼쳤어요. SBS는 신예를 발굴할 신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제작을 논의 중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트로트라는 장르 자체가 재발견되고 있다”고 평했어요.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2000년대 초반엔 가수의 개인 역량에 따라 특정 곡이 크게 주목을 받았지만, 지금은 트로트가 고전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르와 접목되고 있다”며 “예능 프로그램이 여러 방송 문법으로 트로트라는 소재를 재해석하면서 장르 자체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어요.
방송가에서 트로트의 활동 범위를 확장하고, 한국 대중가요로써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는 건데요. ‘트롯신이 떴다’는 국내 최정상급 트로트 가수들이 해외 버스킹을 통해 한류를 전파하는 도전정신이 그려졌죠. ‘미스터트롯’도 오디션을 통해 절박한 청년들의 모습을 담으면서 트로트는 ‘촌스러운 음악’이라는 인식을 깨부셨습니다.
◇ 중장년층이 시작한 ‘덕질’, 2030세대에도 전파
방송가가 트로트에 빠진 데는 중장년층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젊은 세대가 모바일으로 문화를 소비하면서 텔레비전의 주 시청층이 점점 중장년층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겁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8년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1년간 텔레비전 시청을 즐기는 사람은 60대(98.3%)가 가장 많았어요. 이어 70대(97.6%), 40대(97.4%), 50대(97.0%), 30대(96.0%) 순이었죠. 전 연령층에서 텔레비전 시청이 활발한 가운데, 고령층의 비율이 두드러집니다.
특히 ‘오팔세대’(Old People with Active Life)가 트로트의 인기를 가속화했다는 분석입니다. 오팔세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만큼 다양한 취미 활동을 즐기는 신중년을 일컫는데요. 문화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유행을 좇고 원하는 것을 위해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 중장년층이 주요 소비자로 떠오르고 있다는 거죠.
김교석 문화평론가는 “우리나라 중장년층은 모바일도 활발히 사용하고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며 “중장년층의 변화가 시청에도 영향을 미처 새로운 팬덤을 만든 셈”이라고 했어요.
그렇지만 트로트가 중장년층만의 전유물은 아니랍니다. 오디션, 경연 형식 등 2030세대에게 익숙한 방송 문법에 트로트를 접목하니 마냥 어르신들만의 고리타분한 문화로만 여겨지지 않는 겁니다. 트로트 가수들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기도 하고, 팬들과 실시간 화상 대화를 하는 ‘V라이브’를 진행하기도 하죠. 모두 아이돌 가수들이 흔히 사용하는 어린 팬들과의 소통 방법입니다. 임영웅은 최근 TV조선 ‘사랑의 콜센타’에서 젊은 층에 인기를 끈 라틴 팝 ‘데스파시토’(Despacito)를 노련하게 소화해 온라인 상에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요즘 트로트 가수들은 장르적으로 열려있고, 음악적 폭이 넓다”며 “2030세대도 의외의 젊은 감성에 흥미를 느끼면서 전 세대를 아우르는 콘텐츠가 된 것”이라고 말했어요.
다만 양질의 성장보다는, 일시적인 ‘반짝 흥행’에 그칠 우려도 나와요. 김교석 평론가는 “과거 ‘슈퍼스터K’ 등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들도 같은 방식을 되풀이하면서 지루함을 유발해 아무리 새 인물이 등장해도 흥미를 끌지 못했다”며 “시청자의 수준을 맞출 기발한 기획이 없이는, 트로트 소재 인기도 빠르게 식어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트로트 소재의 방송 프로그램이 트로트 역사의 새로운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겠네요.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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