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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베를린서 묻다] 독일 분단은 냉전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었다

입력
2020.05.04 04:40
수정
2020.05.06 08:3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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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6ㆍ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분단의 비극은 북핵 위험으로 더 증폭된 듯 하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독일 경험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글을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서 연재한다.

<1>냉전ㆍ분단 원인은 소통 실패: 안보와 신뢰구축이란 딜레마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뷱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남북의 경계석을 사이에 두고 악수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뷱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남북의 경계석을 사이에 두고 악수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후변화로 바다가 산더미처럼 덮칠까, 나를 닮은 복제인간이 문 앞 초인종을 누르지 않을까 걱정했더니 인류사의 가장 흔하고 오랜 위험이 닥쳤다. 코로나19 걱정이 심각한 지금 냉전과 분단, 평화와 통일 이야기는 좀 한가해 보일 수도 있지만 더 절박할 수도 있다. 삶의 안전과 공생, 신뢰 형성과 갈등 극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과 6ㆍ15 선언 20주년에 더해 독일통일 30주년을 맞는 해다. 분단 한반도의 현실과 통일독일의 역사를 비추어 3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재면 안타깝다. 그렇다고 독일통일을 모범으로 돋우고 ‘독일통일의 교훈’을 탑으로 세울 일은 아니다. 동독 지역의 최근 상황을 염두에 두면 1990년 독일통일을 ‘성공’이라고 무조건 높일 수 없다.

게다가 1990년대 또 다른 정치체의 결합, 즉 1992년에 탄생한 유럽연합과 1997년부터 시작한 중국과 홍콩의 일국양제의 최근 현실은 우리에게 ‘통일’ ‘통합’ ‘연합’에 주춤거리게 한다. 그러니 독일통일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교훈이 아니라 평화정치와 평화문화를 쌓는 성찰 자료로 보는 게 좋겠다.

◇냉전 역사는 잃어버린 평화들의 역사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은 각국별로 천차만별이다. 정부 지도자와 방역기관과 시민사회의 대응 능력과 선택이 다 다르다. 2차대전 후 냉전 대결의 조짐이 드러났을 때도 상황은 유동적이었고 선택은 다양했다. 냉전과 분단의 역사는 그것을 필연으로 보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맞다.

냉전의 역사는 잃어버린 평화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국제 냉전과 한반도와 독일의 분단 옆에 오스트리아의 중립화가 놓여 있다. 다른 길이 망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20세기 후반 냉전과 분단, 그에 맞선 평화와 화해는 항상 역사 행위자들의 선택과 결정의 결과였다.

냉전이 이데올로기 진영 대결의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라고 보면, 냉전과 분단을 놓고 체제나 구조라는 말도 함부로 쓰기 곤란하다. 정치가들의 선택과 결정에 깔린 오판과 무능력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상황의 강박과 조건의 압력 뒤에 숨어 대안 가능성과 운신의 폭 내지 행위여지를 놓친 무작위와 무책임을 보지 못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후 역사가들이 구성한 냉전과 분단의 인과관계 서술도 당시 역사의 승리자들이 사후 퍼뜨린 자기정당화일 때가 적지 않다. 그러니 1945년 이후의 현대사를 배울수록 냉전과 분단의 ‘불가피성’과 결과론적 이해에 익숙해지며 오히려 그것에 맞설 힘을 잃기 쉽다.

냉전과 분단의 역사는 연속성의 신화에 의지한 인습적인 인과관계 이해보다는 단속되고 망각된 반냉전과 탈냉전의 요인과 흐름을 복원하고 부각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푸코의 고고학과 계보학을 빌어 평화사의 관점으로 냉전과 분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 참여한 연합국 수뇌부. 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한국일보 자료사진
1945년 2월 얄타회담에 참여한 연합국 수뇌부. 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한국일보 자료사진

◇얄타회담, 2차대전 전후 협력 첫 걸음

전후 초기 세계는 냉전 대결이 아닌 다른 길들, 즉 더 나쁜 길과 더 나은 길의 가능성이 함께 열려 있었다. 막 끝난 전쟁의 후유증이 아주 컸고 새 전쟁에 대한 공포가 너무 강력해서 핵전쟁을 수반한 제3차 세계대전은 가능성이 낮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1947년 사이에 전승국 대표들은 아직 명확한 세계질서 구성을 확립하지 못했다. 새로운 세계열강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은 사회 체제와 정치 질서가 서로 달랐지만 구체적인 경제 이익이나 현실의 화급함을 놓고 보면 협력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를테면, 소련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 때문에 독자적으로 조달하기 어려웠던 물품들을 미국의 재정적 물질적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반면, 소련의 안보 정책에서 중요했던 동유럽은 미국에게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1945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이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용인하고 소련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해 전후 복구를 도울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에 조응해 스탈린도 소련의 안보 권역만 보장된다면 동유럽에서 소비에트화를 강제할 하등의 이유를 갖지 못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은 미국과 소련의 전쟁 연합이 전후 협력의 과정으로 이행하는 단계의 첫걸음으로 이해되었다.

독일에 국한하면, 애초 전승 연합국은 독일분단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미국, 영국의 수뇌부는 중립주의를 전제로 한 단일 독일 국가 구상을 1947년까지 논의했다. 그 후에도 간헐적으로, 즉 조지 캐넌과 윈스턴 처칠이 소련과의 합의를 통한 단일 독일국가에 대한 논의를 부활시켰다. 그 때도 독일중립화는 선택 가능한 길로 숙고되었다. 소련의 스탈린도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을 받을 욕심에, 미국이 지원하는 서방 통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중립화 통일 독일’을 내세웠다. 단순한 선전술책이거나 교란 작전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나름 진지했다.

그러나 중립 독일이 결국에는 공산화가 되리라는 우려로 서방 연합국 측은 소련의 방어적 태도를 오히려 위협으로 인지하며 동서독 분단을 기정사실화했고, 독일 분단에 기초한 유럽 분열을 전후 유럽 질서로 확정지었다. 이 과정에서 서독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는 시종 소련과의 타협을 거부했고 확고한 서방통합을 주장했다. 그는 독일 분단을 감내하며 서독을 서방 친화적인 중핵 국가로서 건설할 것을 자신의 정치 이념으로 내걸었다.

스탈린은 2차 대전 이후 독일 중립화 방안 등을 제시하며 평화의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다. 플리커 제공
스탈린은 2차 대전 이후 독일 중립화 방안 등을 제시하며 평화의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다. 플리커 제공

독일의 중립화 통일 방안을 담은 1952년 ‘스탈린 각서’는 1949년을 전후한 독일 중립화 방안을 한 번 더 제시한 것이었지만, 서방 연합국과 서독은 냉담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공산주의 위협의 현실화와 전후 경제 재건의 가속화(‘코레아-붐’)는 스탈린 각서를 한낱 서방통합을 방해하려는 공산주의 선전술로 보이게 했을 뿐이다.

스탈린은 한반도 정전협정을 유예하면서도 독일과 유럽에서는 평화의 해결책을 찾아 보려 했지만 더 명확하고 단호한 타협 의지를 보이지 못했다. 게다가 동독의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는 사통당(SEDㆍ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일당 독재나 계급투쟁, 사회주의 독일혁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감히 스탈린의 독일 중립화 구상에 직접 반대하지는 못했지만 동독 체제를 이미 소비에트화함으로써 스탈린의 제안을 무용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독일분단은 이렇듯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냉전 대결의 필연적인 발전의 결과라기보다는 다양한 행위자들과 구상들의 조응과 부조응의 산물이었다.

◇분단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

동서독의 국경이 열린 다음달인 1989년 11월 10일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브란덴부르크문 앞 베를린장벽 위에 올라가 기뻐하고 있다. 베를린=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동서독의 국경이 열린 다음달인 1989년 11월 10일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브란덴부르크문 앞 베를린장벽 위에 올라가 기뻐하고 있다. 베를린=AP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런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냉전과 분단 대결을 규정한 안보딜레마가 자리를 잡았다. 냉전의 양측은 상대방을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침략자로 간주하며 혹시라도 있을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며 무기를 개발하고 동맹을 찾고 안보를 강화했다.

그것은 다시 상대방에 의해 공격 의도의 증거로 인지되었고 그에 맞서 ‘최선의 대비’에 코를 박는 이중적 악순환이 발생했다. 상대 진영의 선의는 그대로 전달되기 어렵고 선의의 타진도 오해 받는다. 방어용이라는 작은 군사 움직임은 말할 것도 없고 결집용이라는 작은 정책 문구도 최악의 시나리오에 맞서 대비책을 구상하도록 자극하고 유도한다.

이렇듯 냉전과 분단의 근본 원인은 “쌍방 간의 인지 오류”와 그것을 낳은 공포와 불신 및 그것으로 인한 소통의 실패다. 대립적인 이데올로기의 소음과 사회체제의 간극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공포와 불안은 인간의 어떤 감정보다 전염이 빠르고 오래 간다. 그것은 실제 위험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주 가상의 위험과 관련된다. 정보 부족이나 왜곡도 그것을 강화한다.

안보딜레마는 탱크로 스크럼을 짜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인지 오류와 의사소통 실패를 극복하는 데서 시작한다. 신뢰는 상대방과의 관계 문제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의 태도 문제이기도 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서독의 평화정치가들은 바로 그것을 실험했다. 냉전의 인습을 팽개치려면 평화정치라는 신종 정치적 판타지가 필요했고 그것은 모험을 수반했다. 그들은 모험이 낳을 멋진 결과를 망상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모험에서 생겨날 위험을 곱셈으로 처리하지도 않았다.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기에 그들은 안보딜레마에서 빠져 나와 신뢰구축을 향해 나아갔다.

코로나19 방역에서 보듯 위험이 심각하고 불안이 확산되면 정치공동체는 비상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방법은 항상 열려 있고 선택은 우리의 것이다. 평화를 위한 ‘손 씻기’와 ‘사회적 거리두기’의 방법을 찾을 때다. 냉전 바이러스에 물든 이들에게 잠시 자가격리를 바란다면 과할까.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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