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장소로 가는 길은 행인들로 북적거렸다. 부딪히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느라 뒤뚱거리며 걸었다. 휴지를 꺼내든 손으로 식당 문을 열고 의자를 잡았다. 음식이 나온 후에야 마스크를 벗었다. 아차! 같은 그릇에 담긴 반찬을 상대방과 함께 먹고 있었다. 불안해진다. 화장실에 다녀올 때 손을 씻은 후 무심코 문손잡이를 잡은 것도 마음에 걸린다. 요즘 일상의 장면들이다.
영락없이 1997년 개봉된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모습과 닮았다. 당시 영화를 볼 때는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주인공이 식당에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를 갖고 다니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웨이터가 잠시 빌려준다는 정장을 병이 옮을 수 있다며 거절한다. 이 정도면 유난 떠는 수준을 넘어 거의 강박증 환자다. 또 다른 영화에서는 오염이 걱정돼 끊임없이 비누로 손을 씻는 장면이 나온다. 예전 같으면 모두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다. 실제로 인터넷을 보면 강박증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약물치료나 행동치료를 권하는 정신과 의사들의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제 코로나19 탓에 영화 속 환자들의 일상이 우리의 일상이 돼버렸다. 그렇다고 누구도 서로를 강박증 환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니 이 용어 자체를 없애는 게 나을 것 같다. 위생에 관한 한 강박이란 말이 더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의 긴장감이 다소 완화되는 분위기가 느껴져 마음이 불편하다.
현실적인 이유에서 등교 개학이며 생활 속 거리 두기 얘기가 나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물론 정부는 최근 감염 확진자 수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정부가 의견수렴을 전제로 발표한 생활방역 수칙은 아직은 다소 약한 느낌이다. 가령 아프면 3~4일 집에서 쉬고, 사람 사이 간격을 넓히며, 환기와 소독을 자주 하고, 기침예절을 지켜야 한다는 얘기는 모두 타당하다. 이와 함께 세부 수칙도 마련되고는 있다. 하지만 그동안 소홀히 지나친 일상의 위험한 순간들을 좀 더 면밀하게 지적하는 강력한 경고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얼마 전 공원을 산책할 때의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고 굳이 개방된 공간에서 필요할까 싶어 마스크를 벗고 걸었다. 마침 공원관리인이 지나가다 큰 소리로 주의를 줬다. 공원 내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망해진 마음에 슬그머니 마스크를 쓰고 걷던 중 의아스러운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대형 카페의 유리창 안에 손님이 가득했다. 그런데 모두 마스크를 벗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을 나서 공원 내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열심히 마스크를 썼지만 정작 사람이 많이 모인 닫힌 공간에서는 무방비인 상황이었다. 정부 수칙에 카페 같은 실내 공간에서도 음료를 섭취할 때만 제외하고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내용을 적시하면 좋겠다. 예전처럼 다닥다닥 붙어 앉으면 ‘절대’ 안 된다는 문구도 포함해서 말이다.
같은 그릇에 담긴 찌개나 밑반찬을 공유하는 우리의 음식문화도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정부가 생활방역 수칙으로 강하게 지정하면 사람들의 생각도 조금씩 변해갈 것이다. 강박증이 심할수록 삶이 안전해질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달리 하루가 멀다 하고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대폭 늘어나고 있는 외국의 상황에 안심이 안 된다.
영화는 주인공이 사랑의 힘으로 강박증을 극복하며 끝을 맺는다. 현실은 강박증을 일상에서 껴안고 살아가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겠다 싶은 안도감이 아니라 좀 더 무거운 강박증으로 생활할 수 있는 방역 수칙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김훈기 홍익대 교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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