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창고 화재 희생자 신원 속속 확인]
“밥 잘 챙겨먹어” 점심 안부 꼭 챙긴 남편, 사회 첫발 20대 청년
중3 딸 돌보려 충북서 통근한 아빠, 中 동포ㆍ카자흐인 2명도
“점심 잘 챙겨 먹어. 거르지 말고.”
지난 29일 오전 11시 40분쯤 강원 원주시의 집에서 김모씨는 남편 문모(52)씨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문씨는 20년간 전국 방방곡곡의 건설현장을 다니면서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내의 점심 안부를 물었다. 거친 일에 힘들었겠지만 집에선 가족이 걱정할까 봐 내색 한번 안 하던 자상한 남편이다.
이날 새벽에도 문씨는 기름때가 잔뜩 묻은 작업복을 입고 경기 이천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현장으로 출근했다. 여느 때처럼 아내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퇴근은 하지 못했다.
저녁 7시쯤이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줄 알았던 남편은 싸늘한 주검이 됐다. 문씨가 일하던 물류창고 지하 2층에서 오후 1시 32분쯤 시작된 불은 삽시간에 건물 전체를 집어삼켜 3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문씨는 지상 2층에서 설비 공사를 책임지던 현장 관리자였다. 물류창고 전체 6개 층 가운데 지상 2층에서는 인명피해가 가장 컸다. 문씨를 포함해 18명이 숨졌다.
신원 확인이 늦어져 김씨는 30일 새벽까지 화재 현장 인근에 마련된 유가족 대기실에서 남편을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남편이 평소 후배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해 집에 와서도 ‘우리 진우(가명), 우리 현석(가명)이’ 하며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다같이 떠나버렸다. 마지막에 다들 얼마나 무서웠을까”라며 흐느꼈다.
중3 딸 키우던 30대 아빠ㆍ아들과 함께 대피하던 父도 참변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로 숨진 희생자의 신원이 속속 확인되면서 이들과 유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설비ㆍ도장ㆍ방수 등 작업을 하던 근로자들은 한 가정을 건사하던 평범한 가장들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정규직이 아닌 일용직 근로자로 알려졌다. ‘황금연휴’를 앞두고도 공사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가족을 살뜰히 챙기던 이들이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옥상에서 판넬 공사를 맡았던 조모(34)씨도 그랬다. 충북 음성군에서 홀로 중학교 3학년 딸을 키우던 조씨는 매일 1시간씩 통근하며 착실히 일했다.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끼니 값도 아꼈다. 조씨의 아버지는 불편한 다리에도 이날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화재 현장으로 달려와 아들의 소식을 구하고 다녔다. 그는 “부인과 아들, 손녀딸이랑 넷이 열심히 살았는데 이런 날벼락이 있을 수 있냐”며 애통해 했다.
부자(父子)가 함께 일하다 참변을 당한 가족도 있었다. 이모(34)씨는 아버지(61)와 지상 2층에서 설비 공사를 하다 불이 번지자 창문을 통해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이씨는 중상을 입고 경기 수원시의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아버지는 30일 오후 2시까지 소재 및 신원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20대 청년들도 화염에…10대 소년은 중상
희생자 중에는 갓 사회 활동을 시작한 청년들도 적지 않았다. 20대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는 “한창 나이에 다른 애들처럼 놀러 다니지도 않고 일부터 배우겠다던 어른스러운 아이였다”면서 “그런 착한 아들을 이젠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게 됐다”고 오열했다. 이천시에 따르면 19세 유모군도 이번 화재로 심각한 화상을 입고 서울 강남구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유가족들은 이날 오전 유가족 대기실을 찾은 엄태준 이천시장을 보고 참았던 울분을 토해냈다. 엄 시장이 “송구하다”며 무릎을 꿇자 희생자 김모(24)씨의 어머니는 “엄마가 어떻게 해야 하니”라고 소리치며 대답 없는 아들을 찾았다. 김씨 아버지는 주먹으로 연신 가슴을 내려치는 아내의 옆에서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객지에서 홀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 3명도 화재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남부경찰청은 “사망자 중 중국동포 1명과 카자흐스탄인 2명의 신원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사망한 중국동포의 친형은 “동생이 시화공단에서 일하다 이틀 전 이천에서 일을 시작했다”며 “한국에서 가족들과 잘 살아보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이렇게 돼 참담하다”고 말했다.
이천=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김영훈 기자 hu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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