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서작성 객관의무 위반에 국가배상 책임 첫 인정
“최초 진술 탄핵하기 어려운 성범죄…방어권 불익 초래”
수사기관이 피의자 진술 조서의 내용을 임의로 수정해 피의자 방어권이 실질적으로 침해됐다면,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피의자신문 조서 작성의 직무상 의무위반과 관련해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김모씨 등 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씨 등은 미성년자이던 2010년 7월 경기도 수원에서 장애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김씨 등은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경찰의 상세한 질문에 짧은 답변을 이어갔지만, 경찰은 이들이 짧은 질문에 길게 답한 것처럼 조서를 바꾼 것으로 파악됐다. ‘장문단답’ 형식으로 진행된 조서를 ‘단문장답’ 형식으로 바꿔, 마치 피의자들이 자발적으로 범행을 구체적으로 진술한 것처럼 조서를 작성한 것이다.
경찰은 이같이 작성된 조서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구속영장을 신청해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 받았다. 하지만 김씨 등은 검찰 단계에서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했고, 피해자나 공범들의 진술도 서로 엇갈렸다. 결국 검찰은 사건을 무혐의로 종결했다. 김씨 등은 “경찰에서 위법한 수사를 받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 2심은 원고 일부 승소를 선고하면서 국가가 이들에게 각 300만원씩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1심 재판부는 “장문단답의 실제 신문내용을 단문장답으로 바꿔 기재한 것은 조서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직무상 과실에 해당한다”며 “이 조서는 이후 영장실질심사나 검찰수사과정에서 소년 원고들의 피의자 방어권 행사에 불이익을 줬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하급심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대법원 재판부는 “수사기관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인권을 존중하고 공정한 수사 등 직무를 수행해야 하며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법규상 의무가 있다”며 “고의 또는 과실로 위 직무상 의무를 위반해 조서를 작성함으로써 피의자의 방어권이 실질적으로 침해했다면, 그로 인해 피의자가 입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재판부는 “성폭력 범죄는 통상 객관적 물증이 부족해 진술증거가 중요한 사건에 해당하고, 제1회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자백한 경우 이후 범행을 부인하더라도 자백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하기가 쉽지 않다”며 “피의자가 소년인 경우 더욱 방어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피의자들은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했으나, 경찰관이 일부 피의자들의 최초 신문조서를 작성하면서 범행 전반에 관해 자발적이고 구체적으로 진술한 것처럼 기재했다”며 “향후 이들이 방어권을 행사하는 데에 불이익하게 작용했다"고 강조했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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