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적 문화 속 상업 활동 발달… 제3국에 중개무역으로 명성
브렉시트 피해 기업들 몰려와…. 세계 최고 교역상 위상 이어갈 듯
<3>뼛속까지 상인의 나라, 네덜란드
※ 오늘날 세계경제는 우리 몸의 핏줄처럼 하나로 연결돼 있습니다. 지구촌 각 나라들의 역사와 문화, 시사, 인물 등이 ‘나비효과’가 되어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인문학과 경영, 디자인, 사회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경제학자의 눈으로 세계 곳곳을 살펴보려는 이유입니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에 한번씩 토요일 연재합니다.
네덜란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농업’이다. 풍차의 나라, 튤립과 같은 원예 강국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다. 최근 들어서는 스마트팜 기술을 선도하는 국가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통계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네덜란드는 세계 2위의 농산물 수출국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속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농업의 나라’라는 말에 고개가 갸우뚱해질 수 있다. 사실 네덜란드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는, ‘상인의 나라’다.
◇상인들의 경제력과 열정이 독립의 원동력
네덜란드는 건국 당시부터 상인들의 영향력이 큰 나라였다. 16세기 초반만 해도 스페인을 통치한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 지배 아래 있었는데,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지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는 나름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더구나 나라가 17개로 나눠져 있어 각 지역의 상인과 귀족에게 주어진 독자적인 권한이 적지 않았다.
특히 정치ㆍ국방ㆍ외교보다 경제활동에서의 자율성이 더 크게 보장됐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상업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 각지를 대상으로 한 중개무역을 통해 커다란 이익을 거둘 수 있었는데, 북유럽 국가들과 영국 그리고 남유럽 국가들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으로 등극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카를 5세는 네덜란드의 경제적 풍요로움을 활용한다. 자신의 출신 국가라서 네덜란드 상인들의 경제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카를 5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개신교를 탄압하고 가톨릭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고 있었던 카를 5세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지기반이 가톨릭이었기에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는 개신교도들이 대부분인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가져왔고, 네덜란드인들로 하여금 독립의 서막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카를 5세가 사망하고 펠리페 2세가 즉위하자 네덜란드의 상황은 더욱 급변하게 된다. 펠리페 2세는 1559년 프랑스와 조약을 맺고 그간의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한다.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관리해 온 네덜란드 지역에서 발을 빼는 정책도 시행했다. 사실 스페인이 프랑스 북부에 있는 네덜란드를 통치한 이유는 유사시 프랑스 북부 지역을 접하고 있는 네덜란드를 통해서 동시에 공략이 가능하다고 판단해서였다. 하지만 프랑스와의 관계가 원만해지면서 더 이상 막대한 돈을 들여 네덜란드에 군대를 주둔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나 대규모 군대를 철수했을 뿐 스페인의 경제적, 종교적 탄압은 도리어 강화됐고, 네덜란드 상인들의 불만은 결국 폭발했다. 1567년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지배에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유럽 각국을 대상으로 교역을 해온 네덜란드 상인들의 경제력과 자립에 대한 열정이 네덜란드 독립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중개무역을 발판으로 ‘농업 강국’이 되다
사실 네덜란드가 ‘농업 강국’으로 칭송 받게 된 이유도 ‘농민’들이 아니라 ‘상인’들 덕분이었다. 네덜란드 국토 면적은 남한의 40% 수준으로 경상남북도를 합친 규모에 불과하다. 이처럼 작은 나라가 미국과 함께 세계 양대 농산물 수출국이 된 것이다. 그런데 네덜란드 농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국가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네덜란드 농업은 중개무역을 통해 이뤄진다. 농산물을 직접 재배해서 수출하기보다는 여타 국가들로부터 농산물을 수입해서 이를 다시 분류, 가공해 적절한 국가에 수출하는 식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카카오다. 네덜란드는 코트디부아르에 이어 세계 2위 카카오 가공 수출국가다. 하지만 정작 네덜란드에선 카카오가 단 1톤도 생산되지 않는다.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 2019년 네덜란드 통계청(CBS) 자료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가공하지 않은 카카오를 총 11억kg 수입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카카오콩(cocoa beans)을 많이 수입하는 국가가 되었다. 금액으로 따지면 2조7,000억원 정도다. 이렇게 수입된 카카오 중 4분의 1은 별도 가공 없이 곧바로 제3국에 다시 판매된다. 나머지 4분의3은 파우더와 버터 등으로 가공하여 다시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이 같은 중개무역 형태의 농업 역시 ‘상인’들의 아이디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카카오콩을 발견한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재배하기보다는 식민지에서 생산한 뒤 유럽의 다른 국가로 수출하는 것이 더 나은 방식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네덜란드는 카카오 무역에 뛰어들었고, 오늘날 전 세계 카카오 원두의 30%를 수입하는 최대 수입국이 됐다.
물론 전 세계를 다니며 교역품목을 찾고 있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눈에 카카오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네덜란드 수출 농산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담배의 경우 수출량은 89만톤인데 비해 잎담배 수입량은 120만톤이나 된다. 담배 수출 실적은 전적으로 수입 잎담배를 가공한 것이다. 커피 부분에서도 네덜란드는 세계 5위의 수입국에 해당한다. 튤립 등 네덜란드 농업을 상징하는 원예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네덜란드는 자체 재배하는 장미보다 더 많은 양의 장미를 유럽 여타 국가에 수출한다. 이 역시 수출하는 장미의 상당수를 해외에서 수입해서 다시 수출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농산물 수출 지역도 갈수록 다변화되는 추세다. 원래 네덜란드 농업 수출 부분은 대부분은 유럽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인접국가인 독일이 전체 수출액의 25%를 차지하였으며, 벨기에가 11%,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9%와 8%를 차지하는 등 유럽 국가를 대상으로 한 수출이 76%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 등 아시아 지역 수출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작지만 작지 않은, 세계 6위 교역국
농업 강국 네덜란드는 몇 년 사이에 더욱 진일보하고 있다. 농산물을 바탕으로 한 고부가가치 사업인 바이오매스, 생명과학, 농식품 산업을 육성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해조류에서 바이오 연료를 추출하는 바이오매스 산업을 국가 차원에서 육성하고 있다. 이미 2019년 신재생에너지를 통한 전략 생산 중 바이오매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26%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또한 농산물에서 추출한 원료를 바탕으로 한 생명과학 산업 그리고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농업 재배 시스템 구축 등 다양한 고부가가치 산업에도 집중 투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고부가가치 산업에서도 다른 국가가 생산한 농산물을 가져다 가공하여 다시 판매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농업이 고도화되는 과정에서도 네덜란드만의 ‘상인 기질’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성과들로 인해 현재 네덜란드 10대 수출품목들은 농산물 자체가 아니라 이를 가공한 의약품, 백신 등으로 채워져 있다.
네덜란드를 설명하는 ‘상인’이라는 키워드는 문화적인 측면에도 적용된다. 네덜란드는 개방적, 관용적 문화로 유명하다. 다른 나라에서는 불법으로 치부되는 것들이 네덜란드에서는 허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 역시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교역을 한 상인들의 특성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자신들의 고유문화나 가치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문화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직접 보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교역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배경으로 꼽힌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네덜란드는 최근 들어 또 다른 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브렉시트’로 인해 영국에 자리 잡고 있던 회사들 중 상당수가 네덜란드로 옮기고 있어서다. 과거에는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영어권 국가인 영국에 사무실을 두고 유럽연합(EU)를 대상으로 사업을 해왔다. 하지만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면서 더 이상 관세 절감, 통상 규제 완화 등의 혜택을 기대하기 어려워지자 새로운 대안으로 네덜란드를 택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소니, 파나소닉과 같은 일본 가전 회사들이 영국 사무실을 철수 내지 축소하고 네덜란드에 새로운 사무실을 열었다. 블룸버그나 디스커버리채널 등의 미디어 그룹도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이전을 완료했다.
네덜란드 특유의 상인 기질에 이 같은 대외 환경 변화까지 맞물리며 네덜란드인들은 앞으로도 세계 최고의 교역상이라는 위상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네덜란드 반경 1,000km 이내에는 2억5,000만명의 가장 부유한 소비층이 인접하고 있다. 또한 나라를 대표하는 로테르담 항구는 유럽 1위, 세계 10위의 물류량을 자랑한다. 교역량과 수출액 기준으로는 세계 6위에 해당하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국가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어디서 어떤 물건을 가져와 누구에게 판매할 지,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유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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