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충북 영동 5km, 구수천 팔탄
충청도는 왜 동ㆍ서가 아니라 남ㆍ북으로 구분했을까. 충북의 제일 남쪽 영동에 갈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영동은 금산을 제외하면 충남의 모든 지자체보다 아래이고, 경북의 많은 지역보다 남쪽에 위치한다. 경북에서 충북으로 흐르는 강이 있다. 상주 모동면에서 영동 황간면으로 흐른다. 영동에선 석천이라 하고 상주에선 구수천이라 부른다. 이 하천을 따라 숨겨진 길이 있다.
상주 북부지역은 위도상 영동보다 위쪽이다. 그러니 죽령ㆍ문경새재ㆍ추풍령처럼 영남 유생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는 길목과는 상관없다. 하천 이름이 제각각이니 아직 길 이름도 명확하지 않다. 상주 안내도에는 ‘백화산 호국의 길(천년 옛길)’로 표기해 놓았고, 영동에선 석천계곡이라 부른다. 트레킹 여행자들 사이에선 ‘구수천 팔탄’으로 더 알려져 있다. 팔탄(八灘)은 여덟 여울이라는 뜻이다. 모동면 옥동서원에서 황간면 반야사까지 약 5km를 흐르며 여덟 번 휘감아 돈다는 의미다.
모동면 시작점은 옥동서원이다. 1518년(중종 13) 황희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존속된 47개 서원 중 하나다. 서원 옆 산꼭대기에 부속 건물인 백옥정이 있다. 가파른 언덕 아래로 구수천이 흐르고, 맞은편으로 백화산(933m) 산줄기가 겹겹이 펼쳐진다.
백옥정 아래부터 본격적으로 계곡길이다. 마을과 농지를 통과한 하천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물은 맑고 골이 깊다. 길은 계곡을 몇 차례 건너며 구수천과 나란히 이어진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듯 물소리 바람소리만 가득한데, 전혀 험하지 않고 물길처럼 순하다. 농가라고는 세 번째 여울, 삼탄 인근의 집 한 채가 전부다. 개울 주변 숲에는 연둣빛 봄물이 짙어간다. 뜬금없이 나타난 출렁다리만 아니면 딴 세상인 듯하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산자락으로 ‘저승골’이라는 등산로 표지가 보인다. 백화산 금돌성(백화산성 혹은 상주산성이라고도 한다)은 1254년 몽골의 6차 침입 당시 민간인과 승병이 힘을 합쳐 자랄타이(차라대ㆍ車羅大)를 지휘관으로 하는 몽골군을 격퇴한 곳이다. 몽골 입장에서 병사의 절반을 잃은 ‘저승골’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패배한 자랄타이의 보복으로 ‘(고려) 고종 41년 한 해 동안 몽병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이 20만6,800여명에 달하고, 살육된 자는 셀 수가 없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바로 옆 바위에 새겨진 김재륜(1776-1846)의 시 팔절명탄(八節鳴灘)은 저승골의 참혹함과는 상관없이 여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퉁소도 거문고도 아닌데 굽이굽이 울리니, 자연의 성악이 돌 사이에서 생겼도다.’
이곳에서 다시 한 굽이 돌면 ‘임천석대’다. 고려 영관이자 악사인 임천석이 왕조가 멸망한 후 대(臺)를 짓고 은둔한 곳이다. 조선 태종의 복귀 요청과 강압에 그는 결국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절명시를 남기고 투신했다. 임천석이 세상과 담을 쌓은 이곳은 팔탄 중에서도 경관이 가장 빼어나다. 햇살에 반짝이는 여울 끝자락으로 수직 암벽이 병풍처럼 드리우고 있다. 계곡 한쪽이 트여 지형상 협곡이라 할 순 없지만, 바위 절벽은 목숨을 던진 충신의 절개처럼 곧고 계곡은 악사의 거문고 가락처럼 깊고 아늑하다.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영동 황간면이다. 마지막 팔탄을 돌면 물가에 반야사라는 작은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신라 성덕왕 때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 때 중건했다고 하는데, 고찰의 풍모는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주변 자연 환경은 이름난 사찰에 뒤지지 않는다. 여덟 굽이를 돌아 온 여울은 폭이 한층 넓어져 사찰 맞은편 습지는 원시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반야사에서 내세우는 자랑거리도 사찰 전각이 아니라 뒤편 산자락에서 흘러 내린 너덜 바위 지대다. 요사채 지붕 위로 보이는 너덜겅의 형태가 호랑이를 쏙 빼닮았다는 이유에서다.
대웅전 뒤편 언덕 꼭대기의 문수전은 여행자에겐 불전이 아니라 환상의 전망대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구수천이 크게 휘감아 돌고, 시선을 올리면 무아지경으로 걸어온 물줄기와 이를 감싼 산세가 첩첩이 포개진다. 문수보살의 지혜가 이만큼 깊을까, 잠시 천상의 세계를 거니는 봄 꿈을 꾼 것 같다.
트레킹 코스의 두 끝 지점, 반야사에서 옥동서원까지는 찻길로 약 8km다. 도 경계를 넘는 지역이어서 대중교통은 없다. 왕복으로 걸을 요량이 아니면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일행의 차량이 2대 이상이면 각각 종착점에 주차하고 다시 합치는 것도 방법이다.
영동=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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