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생겼다. 그전까지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학생 때는 독서, 작가가 된 후에는 그냥 없다고 대답해 왔는데 드디어 내게도 할 말이 생긴 것이다. 바로 식물을 기르는 일이다.
가끔 인터뷰 할 일이 생기면 내 일상을 돌아보게 되는 질문들을 받곤 한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그랬는데, 나는 SNS를 확인한다는 멋없는 대답을 해 놓고 반성한 적이 있었다. SNS에서 받은 좋아요와 댓글, 광고들로 시작하는 아침이란 하루의 시작이 가져야 할 중요한 의미와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습관적으로 SNS부터 확인한다는 건 비유하자면 눈을 뜨자마자 대도시 한복판에 놓인다는 것과 같았다.
식물을 본격적으로 기르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아침에 발코니부터 열어본다는 것이다. 그럴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변화는 냄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으레 맡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이 저마다의 개성대로 만들어 낸 고유의 냄새가 거기에 있다. 식물이 한 종류가 아니고 관엽, 선인장, 허브, 구근까지 다양하니까 그 냄새는 ‘자연’이라는 말로 뭉뚱그리는 편이 오히려 정확하다.
그런가 하면 간밤에 미리 담아 둔 물(수돗물을 바로 주기보다는 두어 시간이라도 받아 놓는 편이 좋다고 한다)과 흙과 비료로 넣어준 원두찌꺼기 냄새까지 어우러지면 거기에는 생장하는 모든 것들이 만들어 내는 풍부한 삶이 있다고 느껴진다. 그러면 휘몰아치듯 흘러가는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거리를 둘 수 있는 힘이 나기도 한다. 손바닥 절반도 되지 않는 다육식물조차 환경에 따라 꽃을 피우고 때론 과감히 잎을 떨구고 방향을 튼다는 것.
나는 자연에 대해 말할 때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 같은 개념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생명체들이 삶이라는 도저한 과제를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다만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려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적응해 살아남으려는 경쟁에 가깝고 궁극에는 그러한 ‘경쟁적 타협’이 자연을 유지시킨다. 새로운 취미를 가지게 되면서 나는 그렇게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질서를 익힌 존재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매일 잎을 틔우고 있으니까.
식물에 관심이 가다 보니 자연스레 그것을 키우는 사람들에게도 눈길이 머문다. 당연히 인터넷 식물동호회에 가입했고 내 발코니 사진을 업로드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이 기른 베고니아, 유칼립투스, 벤자민, 올리브 등을 보며 공감 버튼을 열심히 누르고 있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건 요즘 새삼 깨닫게 되는 일이다. 근처 화원에 가 보면 들어서자마자 탄성을 지르며 식물들의 아름다움에 빠지는 손님들이 언제든 있고, 아파트 장이 서면 이웃들이 벤치로 나와 각자의 원예 경험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며칠 전에는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돌아간 우리 아저씨도 화분 많이 길렀어. 아주 잘 길렀어. 그런데 아저씨가 가니까 그 화분들도 다 가 버리더라고, 사람 없는 걸 식물들이 어떻게 아는지 좀 있으니까 다 같이 가 버리더라고.”
봄의 화분 트럭이 불러들인, 누군가의 살뜰한 손길과 그 정성에 응답하듯 무럭무럭 자라던 식물들에 대한 회상. 내가 거기서 제법 큰 재스민 화분을 사서 값을 치르고 손수레에 실어 끌고 갈 때까지 이웃은 화분을 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식물들이 놓여 있고, 그것을 잘 기르고 싶다는 포부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곳을 쉬이 떠나지도 못했다. 나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가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진정한 삶의 애호가였으리라 생각했다. 일단 식물들이 놀랍도록 잘 자랐고 그 광경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여기 남아 있으니까.
김금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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