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1945년 4월 30일, 베를린 총통 벙커 서재에서, 약 40시간 전 결혼한 에바 브라운과 함께 사이안화칼륨(청산가리)을 먹고 자살했다. 오후 1시 점심 식사를 나누고 괴벨스 등 벙커에 남아 있던 이들과 작별한 뒤 오후 2시 30분에 에바와 함께 서재에 들어갔고, 약 한 시간 뒤 비서진이 시체를 발견했다. 자살 방법을 두고 독약ᆞ권총 자살설 등 이견이 있지만, 목격자들은 전후 조사 과정에 시체가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진술했다.
참모들은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둘의 시신을 태웠고, 스탈린 군대는 유해의 치아 대조를 통해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두개골과 치아 등 신원 확인에 쓰인 유해 일부는 러시아로 보내졌고, 나머지는 버려졌다. 남은 유해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고,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불확실하다. 전후 스탈린은 나치 잔당 소탕을 위해 히틀러의 생존설을 적극 유포했다. 그의 조작된 행적을 흘림으로써 잔당들을 유인한 뒤 소탕하려는 의도였다.
히틀러에게 마지막 나날들은, 선연한 종말의 기운과 심복들의 잇따른 배신으로 비참했다. 소련군은 이미 연초에 베를린 북부 오데르강을 건넜고, 영국군과 캐나다군도 라인강을 넘어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한 상태였다. 남쪽으로는 미국 해병군단이 엘베강을 넘어 베를린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4월 22일 공군사령관 괴링은 히틀러에게 전보로 통수권을 넘길 것을 요구하며 노골적인 쿠데타 의도를 드러냈고, SS친위대를 이끌던 게슈타포 수장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의 재가 없이 제3제국에 항복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처형된 무솔리니의 시신이 거리에 거꾸로 매달려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총통 벙커에 닿은 건 4월 29일 오후였다. 히틀러가 애지중지하던 네살짜리 암컷 저먼 셰퍼드 블론디(Blondi)에게 청산가리를 먹인 게 그날이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선한 이미지를 조작하기 위해 개를 이용하다가 독액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냉혹하게 죽였다는 일부의 주장만은 과장됐다. 4월의 그 시기에 그는 블론디를, 적어도 힘러나 괴링보다는 믿고 사랑했다. 비서진은 평소 히틀러가 에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블론디에게 자신의 침대를 허락했다고 증언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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