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냥의 시간’의 윤성현 감독
영화 ‘사냥의 시간’은 지난 23일 넷플릭스에서 190여개국에 동시 공개되기 전까지 기구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라 2월 극장 개봉이 무기한 연기됐고, 한국 상업영화 최초로 넷플릭스 직행이라는 대안을 택했으나 해외 세일즈 대행사가 이의를 제기하며 법정 다툼을 거쳐 공개가 전면 보류됐다.
투자배급사 리틀빅픽처스와 해외 세일즈 대행사 콘텐츠판다가 합의에 이르며 ‘사냥의 시간’은 대중과 만나게 됐지만 ‘사냥의 시간’ 관계자라면 가슴 졸이며 상황을 지켜봤을 만하다. 윤성현 감독은 더더욱 앞이 깜깜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데뷔작인 ‘파수꾼’(2011)으로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던 그에게 ‘사냥의 시간’은 9년 만에 내놓는 두 번째 작품이다.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에 공개 다음 날인 24일 오후 화상 인터뷰로 윤 감독을 만났다. 그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190개국 공개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설렌다”며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다는 흥분과 기대감이 더 크다”고 말했다.
‘사냥의 시간’은 경제가 붕괴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이민을 위해 범죄를 모의하는 젊은 네 친구와 그들을 ‘사냥’하는 의문의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스크린에 펼쳐진 디스토피아의 풍경과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인상적이다.
-헬조선과 지금 젊은 세대에 대한 이야기 같다.
“맞다. 한참 지옥에 빗대서 젊은 세대 이야기 많이 나왔을 때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 주변에서 생존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젊은 친구들 모습 보면서 우화적으로 풀어보면 좋겠다 생각했다. 젊은 세대의 고통을 장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속 한국사회는 상당히 혼란스러워 보이는데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어떤 계기로 사회가 붕괴된 것일까.
“SF영화보다는 우화적인 형태로 현실적인 지옥도를 그리고 싶었다. 과거에 여행 다니면서 화폐 가치가 붕괴된 국가들을 방문했는데 개인적으로 충격이 컸다. 경제적으로 붕괴됐을 때 도시가 어떤지 본 것이 영화에 영향을 줬다. 나는 IMF 사태를 겪은 세대이고, 이 점도 영향을 줬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개인적 경험을 결합해 만들었다.”
-9년만의 신작이다. 후속작이 늦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파수꾼을 찍고 나서 4,5년 준비한 작품이 있다. 하지만 일이 잘 안 돼서 영화 제작을 포기해야 했다. 그 후 새로 준비하게 된 것이 ‘사냥의 시간’이다. ‘사냥의 시간’ 시나리오 쓰고 촬영까지 하니 4,5년의 시간이 흘렀고, ‘파수꾼’이 나온 지 9년 만에 신작을 낼 수 있게 됐다. 앞으로는 좀 더 영민하게 작업을 해 많은 관객과 자주 만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일본 만화 ‘아키라’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을 연상시킨다.
“두 작품 다 개인적으로 큰 영향 줬다. ‘아키라’는 특히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키라’는 ‘사냥의 시간’에 영향을 주진 않았다. ‘사냥의 시간’은 ‘아키라’처럼 본격 SF물이나 사이버펑크 까지 갈 정도는 아니니까. 그 정도로 나가기에 거리가 있으니 차용하기는 힘들다. ‘칠드런 오브 맨’에는 경제가 붕괴된 영역들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난민이 등장한다. 비주얼적으로 영향 받았고 참고가 된 부분이 있다.”
-사냥꾼인 한을 연기한 박해수는 어떻게 캐스팅했나.
“‘사냥의 시간’에서 장르적인 서스펜스를 만들고 싶었다. 서스펜스를 보여주기 위해 고양이와 쥐가 쫓고 쫓기는 단순한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박해수 배우를 찾게 됐다. 굉장히 이해 가능하고,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악당도 있는 반면, ‘그래비티’의 우주 같이 절대적인 공포 주는 영역도 있다고 생각한다. ‘터미네이터’의 로봇이나 ‘매드맥스’ 시리즈의 수없이 많은 추격자처럼 입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아서 공포스러운 존재가 있다. 심해와 우주는 이해가 안 되니 더 무섭다. 한의 감정 표현을 최소화하고, 인물 걸음걸이와 집안 물체 등으로 캐릭터를 유추하도록 욕심냈다. ‘소수의견’에서 단역을 맡은 박해수를 보고 강렬함을 느꼈고, 그가 연극계에서 유명한 사실을 알고선 대학로 무대를 찾아가 연극을 보게 됐다. 꼭 같이 작업하겠다고 생각했다.”
-청소년과 청년의 불안한 정서를 다룬다는 점에서 ‘파수꾼’의 연장선 같다. 젊은 세대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
“개인적으로 청년세대의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항상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파수꾼’은 내적으로 불안정한 섬세한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사냥의 시간’은 결이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청년을 바라보는 관점이 같으니 비슷해 보일 수 있다. 청년세대에 대한 영화만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이전 준비하다가 제작이 무산된 영화는 청년세대 이야기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청년 세대 이야기를 연달아 만들게 됐다.”
-‘파수꾼’에서 협업한 이제훈 박정민 캐스팅은 처음부터 염두에 뒀나.
“‘파수꾼’을 연출하면서 워낙 좋은 친구들이란 생각이 들었고, 당시 작업 자체가 즐거워서 다시 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파수꾼’ 이후 두 사람은 나와 어느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됐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냥의 시간’을 함께 하게 됐다.”
-영화를 만들며 가장 공들인 점은 무엇인가.
“미술과 사운드다. 디스토피아 세계를 보여주려면 미술이 중요했다. 컴퓨터그래픽과 결합돼 설득력이 있어야 했다. 순제작비 90억원은 적은 돈은 아니지만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만들기에는 충분하지는 않아 영민하게 작업을 해야 했다. ‘파수꾼’은 드라마 위주라 대사가 잘 들리면 됐지만, ‘사냥의 시간’은 달랐다. 배우 대사와 음악, 음향 등 다양한 사운드가 최대치로 잘 배합되기를 원했다.”
-최우식은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최우식이 출연한 단편영화를 2011년쯤 어느 영화제에서 우연히 보고 그를 알게 됐다. 그때 인상적이었다. 좋은 마스크 지닌 배우이구나라는 생각에 꾸준히 지켜봐 왔다. 당연히 ‘거인’이라는 영화를 봤고, 이 배우랑 일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지켜본 배우라 같이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굉장히 동물적인 배우라고 생각한다. 연기를 계산해서 하기 보다 동물적으로 본능적으로 직감적으로 감정을 잡아서 한다. 어떤 연기를 했을 때 그렇게 한 이유를 물어보면 본인도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동물적으로 다양한 표정이 나온다. 같이 일하며 많은 가능성과 재능이 있는 배우인지 알 수 있었다. 굉장히 좋은 배우와 같이 해서 기쁘다.”
-많은 한국 감독이 최근 넷플릭스 등 OTT 드라마 시리즈를 연출하고 있다. 연출 의향이 있나.
“영화라는 관점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그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이런 것만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감독들의 OTT 진출에는 장단점이 있지만 저는 긍정적으로 한국영화에 영향 끼치는 것 같다. 드라마 시리즈는 긴 호흡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긴 호흡의 영화를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긴 호흡, 짧은 호흡 각각 장점이 있다. 이야기에 따라서 시리즈로 갈지, 영화로 갈지 결정하면 된다.”
-차기작은 어떻게 되나.
“‘사냥의 시간’은 저에게 굉장히 큰 도전이었다. 인간 감정에 집중했던 ‘파수꾼’과 화법 자체가 반대인 영화에 도전하고 싶었다. 도전으로 많은 걸 느꼈다. 다음 작품들은 기존 저의 색채들을 담으려 한다. 인간의 감정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담긴 이야기로 돌아가서 제 주특기를 보여주고 싶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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