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봄에 제법 화려한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조카의 충동질에 이끌려 일찌감치 확정한 계획대로라면,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미 서부지역을 여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금 캐듯 눈 부릅뜨고 모아둔 항공사 마일리지를 털어서, 특별히 2층짜리 비행기의 표를 끊었다. 미국사 관련 책을 밑줄 그어 가며 탐독한 후,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거금을 들여 요세미티 공원과 캘리포니아 1번 해안도로에 있는 근사한 숙소를 예약했다.
무릇 계획은 의외의 변수까지 고려해 꼼꼼하게 짤수록 좋다고 나는 믿는 편이다. 그리하여 돌아와 일상에 복귀한 후 허둥거리지 않도록 상반기 출간 예정 원고들까지 손보고 떠나자 마음먹고 여러 날 야근을 했다. 화면이 큰 경량 노트북도 장만했다. 여행지에서 혹시라도 필요할지 모를 자료들을 노트북에 옮겨 담고, 지인들을 만나 은근한 자랑까지 끝내고 나니 2월 중순이었다.
시기를 맞추듯 상황이 급변했다. 예치금을 떼일까 봐 숙소는 서둘러 취소했으나 비행기 표만은 간단히 놓을 수 없었다. 세계 곳곳 하늘길이 막히는 상황에서도 출발 예정일 나흘 전까지 미적거리는 딸을 지켜보던 늙은 엄마가 충고했다. “심정은 이해한다만, 나라가 어려울 때는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국민의 도리다.” 엄마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표를 물린 건, 순전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도리에 맞춰 살자는 마음에서였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지 않아 미국이 저 지경으로 내몰릴 거라고는 트럼프만 모른 게 아니라 나 역시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불안과 불만에 치여 집과 사무실을 오가다 회사 근처 건물 2층에 들어선 인력사무소를 발견했다. 오래 그 자리에 있었으되 지금껏 내 시야에 잡히지 않던 곳이었다. 더불어 그 사무소 계단을 오르내리는 작업복 차림의 남자들이 눈에 띄고, 건물 밖 공터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의 무관심 탓만은 아니었다. 지금껏 그들이 새벽같이 출근해 일터로 갔으므로 마주칠 일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다 일감이 줄며 아침 일찍 현장으로 가지 못한 채 사무소 인근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늘어난 거였다. 점심때까지 일거리를 기다리던 남자들은 오후가 되어서야 공친 하루를 소주로 달래고는 쓸쓸한 표정으로 흩어지곤 했다. 한데 얼마 전부터 그이들이 안 보였다. 그들이 소주를 사 마시던 슈퍼 주인에게 물으니 작업 의뢰 자체가 없어 출근조차 못 하는 눈치라면서 장탄식을 했다.
털레털레 집으로 가는 발이 무거웠다. TV를 켜자 어느 수산물 시장을 취재한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다. 매출이 80% 넘게 줄어든 점포를 지키던 초로의 여성은 힘들지 않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괜찮아요. 우리는 이것보다 훨씬 무거운 고난도 너끈히 견뎌낸 사람들이잖아요. 걱정 마요, 다 잘될 거예요.” 담담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리모컨을 뉴스 채널로 돌렸다.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방안을 놓고 정부와 국회에서 오가는 분분한 말을 보도하고 있었다. 끝끝내 저분들의 눈에는 살얼음판 건너듯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의 절박한 현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낡은 머리 굴리느라 시간 낭비 말고, 하루라도 빨리 전 국민에게 지급해요. 이웃에 기부하든 나라에 반납하든, 나머지는 위기 때마다 똘똘 뭉쳐 국난을 극복한 국민이 알아서 할게요.’
정치하는 이들의 결단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말한다. 지원금이 배당되면 그 즉시 필요한 곳에 기부할 것이다. 더불어 기부에 동참한 나의 오랜 친구들에게 우리 출판사에서 펴낸 책 한 권씩 선물하겠다. 그렇게라도 해야, 치밀하게 계획했으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달려 버린 2020년 봄날이 영 나쁘지는 않았다고 기억될 것 같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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