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 등의 성착취 영상을 제작ㆍ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대책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이들 범죄와 관련한 감시, 처벌,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종합적 근절 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23일 정세균 국무총리 주재로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를 열고 아동·청소년이용성착취물 관련 범죄 처벌 상향 등을 골자로 한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을 심의 확정했다. 디지털 성범죄가 특정인이 지속적으로 착취하면서 이를 통해 범죄수익을 창출하는 등 악질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법정형 상향… 수사단계부터 신상공개
우선 정부는 법 개정을 통해 관련 범죄의 법정형을 상향, 처벌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판매 행위의 하한을 징역 5년 이상으로 상향하는 아동ㆍ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미성년자 강간죄의 경우, 실제 범행까지 이르지 않고 준비나 모의만 한 경우에도 예비ㆍ음모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SNSㆍ인터넷 등을 통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광고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 근거도 신설된다.
실제 선고되는 형량을 강화하기 위한 준비도 진행 중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디지털 성범죄 양형 기준 강화를 논의하고 있다. 검찰은 지난 9일부터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강화된 사건처리기준과 구형기준을 마련하여 시행 중이다.
이 밖에 정부는 ‘독립몰수제’를 도입해 피의자의 해외도피나 사망 등의 이유로 기소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별도의 청구를 통해 범죄수익을 몰수한다는 계획이다. 범행기간 중 취득재산을 범죄수익으로 추정하는 규정도 마련된다.
또한 주요 피의자의 얼굴 등 신상정보를 수사단계에서부터 적극 공개하고,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판매로 유죄가 확정된 이들도 신상공개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의제강간죄 기준 16세 상향… 성착취물 ‘구매’도 처벌
특히 정부는 ‘n번방’ 사건을 통해 발견된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처벌의 대상도 확대하기로 했다.
우선 상대방이 동의를 했고, 협박이나 폭력이 없더라도 성폭행으로 간주해 처벌하는 ‘미성년자 의제강간죄’의 기준 연령을 기존 13세 미만에서 16세 미만으로 상향하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n번방 사건 등에서 미성년 피해자가 다수 발생하는 등 미성년자 보호공백이 드러났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해외의 의제강간 기준 연령은 △일본 13세 △독일 14세 △영국 16세 △미국 16~18세 등이다.
아동이나 청소년을 유인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적으로 착취하는 ‘온라인 그루밍’ 처벌도 신설된다. 정부는 온라인으로 접근한 뒤 ‘성적 영상물·사진 요구’와 ‘유포협박’, ‘만남요구’로 이어지는 일련의 단계를 처벌할 수 있도록 법 규정을 마련하기로 했다.
또한 다운로드가 아닌 스트리밍으로 성착취물을 접하는 수요자들이 많아진 상황을 고려해, 성착취물을 소지하지 않고 구매만 한 경우에도 처벌할 수 있도록 아동ㆍ청소년 성착취물 구매죄를 신설하기로 했다. 아동·청소년이 아닌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물을 소지하는 경우에 대한 처벌조항도 신설된다. 이 밖에 아동ㆍ청소년 성착취물을 소지만 한 경우에도 학교ㆍ어린이집 등 취업제한 대상으로 추가된다.
◇위법성 논란 일던 잠입수사도 허용
특히 정부는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해 잠입수사를 허용하기로 했다. 디지털 성범죄물의 유통이 갈수록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등 폐쇄성과 보안성 때문에 적발이 어렵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수사관이 미성년자 등으로 위장해 수사하는 잠입수사를 도입하겠다”며 “수사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즉시 시행하고, 잠입수사 과정에서의 수사관 보호 및 향후 재판과정에서의 증거능력 등을 고려하여 법률에 근거를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잠입수사는 마약 수사 등에 주로 활용되고 있는 수사기법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범죄에 관여하는 정도나 방법에 따라 위법성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체포 피의자를 필리핀 조직에 잠입시켜 정보수집 활동을 하도록 한 부산경찰청 소속의 경찰관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일도 있었다. 대법원은 범죄의 의도를 가지지 않은 자에 대해 범행을 유발하는 ‘범의유발형’ 수사에 대해 “위법하다”는 판례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법조계에서도 이미 범죄 의도를 가진 자에 대해 단순히 범행의 기회를 제공하거나 범행을 용이하게 하는 것에 불과한 ‘기회제공형’ 수사는 필요하다는 의견이 주류다. 미국 등 해외에서도 ‘기회제공형’ 수사의 경우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정부가 잠입수사 도입을 공식화함에 따라 수사관의 범죄 가담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고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 관계자는 “잠입수사를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잠입수사관의 수사보고와 사법적 통제는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수사의 위법성이나 인권침해 논란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 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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