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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제주에서 안 살고 술도 세지만 “외로워도 웃는 시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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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제주에서 안 살고 술도 세지만 “외로워도 웃는 시 써요”

입력
2020.04.23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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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라는 평가와 함께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한 이원하 시인. 이 시인의 첫 시집 해설을 쓴 신형철 평론가는 “이런 재능은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을까”라며 놀라워했다. 홍인기 기자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라는 평가와 함께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한 이원하 시인. 이 시인의 첫 시집 해설을 쓴 신형철 평론가는 “이런 재능은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을까”라며 놀라워했다. 홍인기 기자

시가 꼭 시인을 닮으란 법은 없지만, 이원하 시인의 시는 시인을 꼭 닮았다. 시종일관 보조개를 움푹 패며 환히 웃는 탓에 마주앉으면 자연스레 따라 웃게 된다. 이 시인의 첫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역시 독자를 배시시 웃게 만드는 시들이 가득하다.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라 고백한 시가 뽑혔을 때, 문단은 “대체 이런 시인이 어디 숨어 있다 나타났냐”며 술렁댔다. 이 놀라운 신인은 데뷔 첫 해 문예지 등의 청탁만으로 44편의 시를 지었고 출판사 사정으로 1년 늦춰진 걸 감안해도 데뷔 2년만에 첫 시집을 내놨다. 첫 시집은 출간 일주일 만에 벌써 3쇄를 찍었다.

실제론 ‘이제 더 이상 제주에 살지 않을뿐더러, 알고 보면 술도 센’ 이 시인을 지난 17일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이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제주에 갔다. 남들은 부러워할 제주살이에 대해 다른 얘길 들려줬다. “처음엔 섬이 끔찍했어요. 벌레가 너무 많아서요.” 버틸 수 있는 힘은 ‘그분’이 주셨다. “시고 뭐고 그만 육지로 가려 할 때 ‘그분’이 제주로 와서 잠시 함께 지냈어요. 그렇게 싫었던 벌레는 눈에 안 들어오고 제주가 그저 아름답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때 제주는 수국이 한창이었다. 등단작에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라는 구절은, 그래서 들어갔다.

데뷔 2년만에 첫 시집을 엮은 데 이어, 다음달에는 산문집도 나온다. 역시 제주살이를 담은 산문이다. 홍인기 기자
데뷔 2년만에 첫 시집을 엮은 데 이어, 다음달에는 산문집도 나온다. 역시 제주살이를 담은 산문이다. 홍인기 기자

‘그분’은 등단시뿐 아니라 시집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시집에 실린 모든 시가 육지에 있는 단 한 사람, ‘그분’을 그리며 써서다. 시집 자체가 연서(戀書)다. 조곤조곤 고백조의 시 대부분이 경어체인 이유다. “가끔 반말로 쓴 시도 있는데, 그건 그분한테 화가 나서 괜히 반말하고 싶을 때 쓴 거예요(웃음).”

그런데 그분은 좀체 반응이 없어 시인은 자주 고독했다. “결핍에게 슬쩍 전화를 걸어”본다든가(‘그날부터 웃기만 했어’ 일부), “아픔이 그리운 날엔/베개 모서리로 내가 나를 긁”으며(‘풀밭에 서면 마치 내게 밑줄이 그어진 것 같죠’ 일부) 혼자인 시간을 견뎠다. 그렇게 “혼자 한가해서 매번 혼자 회복”한 끝에, 결국 스스로 “섬이 되어 버”리고 만다. (‘동경은 편지조차 할 줄 모르고’ 일부)

너무 외로워 자주 울건만, 시들은 침울하다기보다 씩씩한 느낌이다. 외로움과 싸운다기보다 외로움과 잘 지내보려 안간힘 쓰는 것 같다. 그건 시인의 성격 탓이다. “병적일 정도로 제겐 웃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사람들은 저나 제 시를 보고 참 밝다고 하시는데, 제주에서 저는 거의 죽고 싶을 정도로 슬펐거든요. 근데 외로움과 슬픔의 얼굴도 여러 가지일 수 있잖아요. 외로운데도 웃을 수 있고요. 아마 제 시도 그런 제 얼굴 같은 거겠죠.”


시인의 꿈은 “사람들을 웃게 하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제가 웃는 이유는 결국 상대방이 웃어줬으면 해서예요. 미모사 꽃을 좋아해요. 딱히 예쁘진 않은데 만지면 움츠러들어요. 그렇게라도 관심 끌려는 것처럼요. 제 시를 예쁘다 하시는 건, 결국 제가 예뻐해달라 갈구하기 때문이에요. 저 좀 사랑해줬으면 좋겠거든요. ‘그분’은 결국 사랑을 안 줬지만 그 대신 독자분들이 사랑을 주니까, 요샌 제가 이긴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음에는 누구를 향해 연서를 띄울까. 일단 발신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정해졌다. 왜 하필 부다페스트일까. “‘부’라는 단어가 좋아서요. 써도 귀엽고, 말해도 귀엽잖아요.” 코로나19 사태가 잠잠해지면 곧바로 떠날 예정이다. 그곳에서 쓰는 편지 또한, 시인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시들일 게 분명하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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