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노동운동은 해방 이후 미군정, 자유당, 군사정권의 연이은 탄압의 굴레 속에 갇혀 있다 1990년 전노협, 1995년 민주노총의 건설을 통해 비로소 자립의 길을 찾아 나섰다. 출범 당시 이들 두 조직은 ‘창립선언문’과 ‘강령’(제3항)을 통해 모두 산업별 노동조합을 목표로 내세웠다. 하지만 우리 민주노조운동은 30년이 되도록 이 목표에 제대로 다가가지 못하였고 지금 거의 좌초해 있는 실정이다.
촛불혁명 이후 새 대통령의 취임 첫걸음이 비정규직 문제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노동문제의 주체가 좌초해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는 지금 시대적 과제 앞에서 표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시점에 “고전”으로 손꼽히는 헬가 그레빙의 ‘독일 노동운동사’가 출판된 것은 매우 시의 적절한 일로 생각된다. 독일 노동운동은 우리 민주노조운동이 지향했던 산업별 노동조합의 세계적 전범을 이루는 “독일 모델”을 직접 만들어낸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같은 제목의 그레빙 책이 1966년 국내에서 출판된 적이 있는데 이번의 책은 그 책과 완전히 별개의 책이다. 1966년 책은 1945년 이전의 시기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반해 이번 책은 그 이후 시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두 책은 독일 노동운동사 전체의 조망에 있어서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레빙이 이 책에서 독일 노동운동을 다루는 방법은 전통적인 방법과 거리가 있다. 노동운동은 원래 자본주의의 모순된 현실을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탄생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목표와 그 목표의 실천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적인 방법은 대개 실천을 이 목표(주로 마르크스주의)에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해석하거나 목표와 실천의 불일치를 비판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빙은 이들 경향을 모두 반대하고 목표의 경직성보다 실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목표와 실천의 차이를 불일치라기보다 실천의 현실적 적응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레빙의 책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두 가지만 언급해 보기로 한다.
첫째 독일 노동운동은 어려움과 굴절을 겪으면서도 15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30년밖에 되지 않은 우리 민주노조운동은 아직 좌절하기 이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둘째 그것이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유연성과 실용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상징적인 것으로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전환한 1959년의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들 수 있다.
훗날의 논쟁거리가 되는 이 강령에 대해 그레빙은 파시즘과 볼셰비즘의 현실 사이에서 내려진 실천적 고민의 산물이었다고 해석한다. 목표가 좌초된 현실에서 사실상 모든 실천을 내려놓은 우리 노동운동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독일 노동운동사
헬가 그레빙 지음ㆍ이진일 옮김
길 발행ㆍ442쪽ㆍ3만3,000원
한 가지 유념했으면 하는 부분도 있다.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노동관계를 이미 달성하였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현실모순에서 노동문제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간주한다. 실천 현장에서는 환경, 민족, 난민 등의 의제가 노동보다 더욱 부각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그레빙은 노동운동의 시대가 끝났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독일에 해당될 뿐 아직 세계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의 노동관계에 머물러 있는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레빙이 강조하는 노동운동의 미래도 의미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 책에 담긴 과거 노동운동의 경험과 성과가 더 많은 교훈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앞선 역사에서 끊임없이 교훈을 얻어내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가차없이 밀려오는 시간의 파도에 파묻혀 미래의 전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이 책은 교훈적으로 말해준다. 좌초의 함정에 빠진 우리 노동운동에게 이 교훈이 희망의 사다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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