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총선 후 처리” 약속했지만, 재난지원금 신경 쓰느라 미적
계류 법안 1만 5,434건. 다음달 29일 임기 종료를 앞둔 20대 국회의 예비 성적표다. 이 법안들은 이달 16일부터 소집된 이번 국회의 마지막 임시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면 자동 폐기된다.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 재발 방지법’부터 식물국회 방지를 위한 ‘일하는 국회법’까지, 여론이 끓어오를 때마다 여야가 앞다퉈 해결을 약속했던 사안들이다. 그러나 이번 국회에서 입법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총선 후폭풍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여야는 국회 의사일정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총선이 끝나면 국회가 해이해지고, 미뤄 둔 법안이 무더기로 버려지는 악순환이 4년마다 반복되는 것이다.
법안을 손도 못 대고 폐기하는 것은 국회의 고질병이다. 역대 국회 법안 처리율은 17대 53.31%, 18대 49.05%, 19대 46.52%였다. 20대 국회의 법안 처리율(4월 21일 기준)은 37% 수준으로, 2000년 이후 최악의 국회가 될 위기에 처했다. 폐기된 법안은 16대 국회에서 882건, 17대 국회 3,582건, 18대 국회 7,220건, 19대 국회에선 1만190건이었다.
여야가 ‘21대 총선 이후’를 약속한 대표적 과제는 n번방 사건 방지법 처리다. 조주빈 등 n번방 운영진 체포와 신상 공개를 계기로 공분이 커진 지난달 말, 근본 원인의 한 축이 입법 미비로 지목되면서 이목은 국회의 역할에 집중됐다. 정치권은 너나 없이 관련 법안을 쏟아냈다. 지난달 30일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문희상 국회의장을 만나 ‘원포인트 국회’를 열어 n번방 방지법을 처리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심 대표는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결단하면 하루 선거운동을 중단하더라도 충분히 해결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의장께서 적극 주선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총선 이후인 5월에 처리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내놨다. 통합당은 해결 의지를 다지면서도 입법 시한을 못박지는 않았다.
21일 현재 백혜련 의원 등 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발의한 ‘n번방 방지 3법’을 비롯해 관련 법안 10여개가 발의돼 있다. n번방 방지 3법은 불법 촬영물을 이용한 협박을 특수협박죄로 처벌하고, 상습범을 가중처벌하고, 유포 목적이 없더라도 불법 촬영물이나 복제물을 다운로드받는 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 영리 목적 처벌도 현행보다 대폭 강화는 취지다. 하지만 이 법안들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지난달 23일 회부된 이후 단 한 차례도 논의되지 못했다.
계류 상태로 국회를 떠도는 미처리 법안 중에는 ‘일하는 국회법’도 있다. 문희상 의장, 원혜영 민주당 의원 및 정병국 통합당 의원 등 여야 불출마 중진의원, 박주민 민주당 국회혁신특위원장 등이 마련한 관련 법안 10여건이 제출된 상태다. 국회를 상시 운영하고, 회의 불참 시 의원 세비를 삭감하고, 국회 윤리위원회를 상설화한다는 내용 등이 골자다. 이 법안들 역시 국회 운영위원회에 제출된 이후 관련 논의를 진행하지 못했다.
그 밖에는 △제주 4ㆍ3 특별법(허위사실 유포 금지, 트라우마 치유센터 설립, 보상금 규정 신설 등) △공직자 이해 충돌 방지법(직무 수행 중 이해관계 개입 금지)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결정에 따른 개정 시한을 넘긴 세무사법 등이 계류돼있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21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표단ㆍ상임위 간사단 연석회의에서 “20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최소한 선거 때 한 3가지 약속만은 꼭 지켰으면 한다”며 “n번방 재발 방지 3법 처리, 제주 4ㆍ3특별법 통과, 일하는 국회법 반영 등을 해내기 위해 야당의 협조를 당부한다”고 했다. 하지만 여야는 이날도 원내대표급 회동 조차 성사시키지 못해 마지막 임시국회를 소집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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