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현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공동대표 인터뷰
“여성 공산당원 캐릭터, 괜찮을까요?”
지난 2월 젊은 역사 연구자들과 게임 개발자들의 만남. 신중한 건 역사 연구자가 아니라 게임 개발자들이었다. 역사를 대중문화, 즉 영화, 드라마 등으로 각색해낼 때 불편한 기색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쪽은 늘 연구자들이었다. 대중적 판타지의 악영향을 걱정했다. 자문에 참여해도 나중에 ‘내 말은 별로 안 듣더라’고 투덜대는 쪽도 연구자들이었다.
이날은 게임 ‘페치카’(난로)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 1910~20년대 일제 강점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가 주무대인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개발 중인 게임이다. ‘페치카’라는 게임명도 연해주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최재형(1860~1920) 선생 별명에서 따왔다.
이 게임에는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친일파, 사회주의 혁명가, 밀정 등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게임 기획자들은 회의를 거듭하다 이 캐릭터 중 하나로 소련 공산당 소속 여성 당원을 넣자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이를 두고 의견이 이리저리 갈리자 역사 연구자에게 자문을 구해온 것.
연구자들 반응이 되레 쿨했다. “게임은 논문이 아니잖아요.” 게임상의 캐릭터일 뿐이라는 점만 분명히 알린다면 그 정도는 허용된다는 설명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게임을 주도하는 캐릭터가 여성 공산당원이라면 페미니즘이 강력한 지금의 시대 분위기에 잘 어울리고, 일정 정도 메시지도 줄 수 있으니 오히려 괜찮은 발상이라 격려까지 했다.
최근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만난 김태현(32)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이를 ‘공공역사’(public history)로 풀이했다.
만인만색의 신념 중 하나는 “역사 재현은 독점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학자뿐 아니라 드라마 작가, 출판사 편집자, 미술관 큐레이터 등은 물론, 게임 개발자까지 모두가 역사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공공역사다. 만인만색은 박근혜 정권 시절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막기 위해 출범한 젊은 연구자들 모임이다. 김 공동대표도 근현대사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젊은 연구자다.
만인만색에 도움을 요청한 게임 회사는 ‘자라나는씨앗’이다. 이 회사는 사회적 가치에 기여하는 게임 개발을 내세운 인디 업체였다. 그냥 즐기기만 하는 게임이 아니라 그 배경에 의미를 불어넣고 싶어했다. 그런 배경 아래 2018년 ‘지킬 앤 하이드’ 게임을 내놓기도 했다. ‘페치카’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게임이다.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그럴 듯한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자라나는씨앗’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연해주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게임을 만드는데 “‘국뽕’(지나친 국수주의를 비하하는 속어)을 배제하고 ‘지배와 저항’이라는 단순 이분법도 극복하려 하니 감수와 조언을 해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게임 회사의 제안치고 특이한데, 김 공동대표의 반응도 연구자 반응 치고는 이상(?)했다. “좀 재미없어도 역사학자들한테 욕먹지 않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하시길래 ‘그러면 망하실 텐데요’ 하면서 웃었죠.” 이런 뒤바뀐 입장이 게임이란 이름 아래 아무렇게나 역사를 구겨 넣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오히려 서로에 대한 신뢰로 발전했다. 이 신뢰는 지난달 양측의 업무협약 체결로 이어졌다.
구도가 이렇게 되면 역사를 게임화하는데 따른 논란 혹은 부담은 만인만색 측이 지게 되는 건 아닐까. 김 공동대표는 오히려 공공역사 측면에서 게임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봤다. “문학에선 ‘시적(詩的) 허용’이란 게 있잖아요. 게임에도 논문이 시도하기 어려운 ‘게임적 허용’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장점은 하나 더 있다. “게임이란 매체는 어둡고 무거운 우리 현대사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고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페치카’ 출시 시기가 6월로 미뤄졌다. 김 공동대표는 게임의 완성도를 더 높이겠다 했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선택의 고민, ‘페치카를 즐기니 책 한 권을 읽었다’는 느낌을 드리고 싶어요. 페치카의 성공이 공공역사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마중물, 이정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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