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문재인 대선캠프 핵심 멤버였던 한 인사는 2017년 5월 9일 투표 전 참모들이 준비했던 일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D데이, D+1일, D+1주일 등 당선 이후 계획을 미리 다 짰다. 일자리는 어떻게 챙겨야 할지, 인사에서 감동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추가경정예산안과 정기국회 예산안 처리 방향 및 연말까지 목표 등도 설정했고 2018년 지방선거 전후 추진 과제 등도 다 정리해뒀다.”
이렇게 해서 9일 밤 문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고 10일 취임식 후 곧바로 이낙연 국무총리,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인사안을 발표할 수 있었다. 12일 첫 외부 일정으로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포한 일이나 국정교과서 폐지, 정윤회 문건 수사 지시 등 적폐청산 작업의 선명한 메시지도 미리 준비된 도상 계획대로 하나씩 펼쳐졌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10년 집권 경험에다 이명박ㆍ박근혜 정부 9년 동안 이를 갈며 준비한 문재인ㆍ더불어민주당 정부였다. 선거운동 때부터 당선 이후를 그렇게 철저히 대비했을 정도니 초반에는 각광도 받았다. 이렇게 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지난 3년 정권 운영은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4ㆍ15 총선 결과 더불어민주당은 더불어시민당을 합쳐 180석을 얻었다. 압도적 승리다. 21대 국회 내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의석 숫자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겸허한 통합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겠다.” 민주당 지도부도 이렇게 다짐했다. 그러나 승리가 예상된 시점부터 과연 민주당이 21대 국회 출범 후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미리 정비하고 계획을 짰는지는 잘 모르겠다.
2004년 17대 총선으로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확보한 적이 있다. 민주당 계열 정당의 첫 의회 장악이었다. 심지어 대통령도 같은 당이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임기 4년간 과연 무슨 성과를 이뤘는지는 의문이다. 국가보안법, 사학법 등 많은 법안을 바꾸려 했고, 구조나 제도도 뒤엎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의욕 넘치는 초선 의원 108명의 목소리를 조율할 지도부가 없었다. 당 차원의 정밀한 계획도 부족했다. 말만 많고 능력은 모자랐던 4년의 실패였다. 정당이 정책을 내면 선출 권력과 전문 관료들이 이를 집행하고 다시 정당이 이끄는 선순환구조가 필요했지만, 역량은 미치지 못했다. ‘민주당, 이번에는 준비가 돼 있는가’ 자문자답이 필요해 보인다.
또 하나 묻고 싶은 건 한국 정치를 ‘정당정치의 무덤’으로 만든 과오에 대한 반성 문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얘기다. ‘그들이 꼼수를 쓸 때 나는 정도(正道)만 걷겠다’는 자세보다는 진흙탕 싸움을 할지언정 한 석이라도 더 얻겠다는 게 민주당 지도부의 계산이었다. ‘이기면 장땡’이란 식이었다.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내세운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라는 구호는 희화화됐다. 결과에 급급해 공정한 과정의 중요성은 무시됐다. 민주당이 미래통합당처럼 며칠 사이에 뚝딱 위성정당을 만드는 식으로 정치문화를 퇴행시킨 책임은 처절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과연 이렇게 얻은 의석으로 무슨 정치를 하려고 했나. ‘100년 정당 100년 집권’을 꿈꾼다면서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끊임없이 되묻는 21대 국회가 되길 바란다.
승리의 샴페인은 하루면 족하다. 코로나 시대 경제 위기, 양극화 심화, 청년실업, 안전 문제 등 현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새로운 국제질서, 자국 이기주의와 봉쇄정책 기류,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코로나 대처 과정에서 입증한 한국적 민주주의의 힘이 훼손되지 않도록 민주당은 제발 21대 개원 전 남은 두 달이라도 분발해 이런 현안마다 대책을 준비했으면 한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 ‘친노 폐족’이라는 뼈아픈 결과를 가져왔던 17대 국회의 실패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정상원 정치부 외교안보팀장 orno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