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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공중 도시, 메테오라에서 고립을 말하다

입력
2020.04.17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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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메테오라. ©게티이미지뱅크
그리스 메테오라. ©게티이미지뱅크

눈으로 보기 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풍경들이 있다. 높고 낮은 산들이 다채롭게 이어지는 한국의 멋진 산세에 이미 익숙한 우리 눈에도 “아, 세상에 이런 데가 있었나”하는 감탄이 절로 새어 나오는 곳들. 하루에 달랑 한 대뿐인 기차를 타고 아테네를 출발한 지 어느새 다섯 시간, 삐걱거리는 완행열차에서 몸이 배배 꼬일 무렵이면 땅에서 하늘까지 석순이라도 자란 것처럼 솟아오른 바위들의 숲이 나타난다. 도무지 올라갈 길을 찾을 수가 없는 그 울퉁불퉁한 회색 바위덩어리 꼭대기에는 인간이 정성 들여 지은 것이 분명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올라 앉아 있다. 사람이 접근하기는 거의 불가능이라 ‘하늘의 기둥’이라고도 불리던 지역,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을 가진 메테오라(Meteora)다.

중세 유럽에서는 조금이라도 신에게 가까이 가고픈 열망을 뾰족한 성당의 첨탑으로 표현하곤 했는데, 그 마음을 반영이라도 하듯 구름 바로 아래 드높은 절벽 꼭대기에는 수도원들이 세워졌다. 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금욕 생활을 하는 수도자가 하나 둘 낭떠러지의 동굴에 은거하기 시작해, 낮게는 300m 높게는 550m를 훌쩍 넘는 바위기둥 하나씩을 수도원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암벽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이나 아슬아슬한 다리라도 있지만, 당시 수도원으로 올라가려는 용감한 순례자들은 그물망을 끌어 올릴 밧줄 하나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했다. 도르래로 감아 올리던 밧줄이 끊어져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니, 이곳에 오르는 것 자체가 절박하고 확고한 믿음의 증거였던 셈이다.

빠르게 변하는 외부의 영향권에서 비켜난다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속세로부터 벗어나 절대 고독을 찾으려는 은둔자들의 본거지였던 메테오라는 뜻하지 않게 인류문화유산의 보존자로 등극한다. 스스로를 감금한 수도자들이 성당 벽에 빼곡하게 남겨 놓은 프레스코 화들은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사라져버린 후기 비잔틴 회화의 발전상을 알 수 있는 훌륭한 증거가 됐다.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15세기 말에는 사람들이 더욱 모여들어 수도원이 24개까지 늘어났고, 식민지 상황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출 뻔한 그리스 전통을 후세에 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슬프게도, 메테오라의 수도자들이 천 년 전부터 해오던 칩거 생활이 오늘날의 세계인에게도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겪어 내고 있는 자발적인 고립의 시간은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속도를 더해가던 물리적인 연결망이 잠시 끊어지고 나니, 그저 속도에 떠밀려 가던 이들이 주변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동경했던 타국의 문화가 어쩌면 옛 제국의 허상은 아니었을까 의심해 보게 되었고, 앞선다고 믿었던 나라들의 허술한 공공의료체계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급 간 양극화의 맨 얼굴도 지켜 보았다.

바깥에서 매일 반복하던 일상이 사라지고 나니, 당연했던 일들이 의미 없는 습관은 아니었는지 또 지금 가는 길이 옳은 방향인지 되짚어볼 여유도 생겼다. 매번 결심만 하던 공부를 실천에 옮기는 이도 있고 차일피일 미뤘던 짐 정리를 이참에 해치운 이도 있다. 하루 종일 붙어 있게 된 가족과 투닥투닥하는 일은 늘었지만 그간 묵혀 두었던 갈등을 풀 기회를 발견하고 가까운 이들의 감정을 쓰다듬는 방법을 배운 이는 더 많다. 인류의 잠시 멈춤에 대자연이 치유와 회복의 시기를 가지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도 제대로 잘 살고 있는 건지 질문을 던져 볼 차례가 온 것이다. 천 년 전 수도자들이 단절과 멈춤을 수행의 방법으로 이용했던 교훈을 1%라도 배울 수 있다면 긴 인류의 시간 속에서, 그리고 짧은 개인의 역사 속에서 의미 있는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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