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서동원 올랜드 아울렛 회장
비 피할 처마만 있어도 장사할 수 있다
팔자 고치려다 더 큰 손실을 입을 뻔
원스톱 쇼핑 위해 발품 파는 시간 단축
‘천원의 행복’, ‘반의반의반 값’이벤트
1인자 되어 형의 꿈 이루겠다 다짐
미국 연수시절 코스트코 매장에서 흔히 목격했던 장면이 TV나 컴퓨터 등을 반품하는 것이었다. 소비자들이 일정기간 사용해보고 매장에 가서 반품을 하면서 ‘I don’t like it’(마음에 들지 않아요)이라고 하면 직원들이 군말 없이 돈을 돌려주는 게 신기했다. 지금은 우리도 홈쇼핑 등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택배로 반송하는 일이 흔해졌다.
이를 다시 손질해 판매하는 제품이 리퍼브(refurbished) 제품으로, 우리 말로는 ‘재공급품’이라고 한다. 반품이나 전시상품 등 약간의 흠이 있는 제품이나 이월상품, 단종상품 등을 잘 다듬어 할인된 가격으로 다시 판매하는 방식이다. 유통업체는 재고를 줄일 수 있고 소비자들은 약간의 흠이 있더라도 대폭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어 서로 이득이 된다. 특히 식품류 리퍼브제품은 쓰레기를 줄일 수 있어 환경보호 차원에서도 유용하다. 온라인이나 홈쇼핑 시장이 커질수록 리퍼브시장도 커진다.
이미 우리나라 리퍼브시장 규모가 300개 업체에 1조원에 달한다. 특히 지금처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등으로 불황이 심해질 때 아연 활기를 띄는 곳이 리퍼브 매장이다. 국내 최대 리퍼브 전문기업으로 연매출이 1,000억원에 달하는 올랜드 아울렛 서동원 회장을 최근 만나 리퍼브의 세계에 대해 얘기를 들어봤다.
-출발이 서울 청계천 중고 전자제품 가게다.
“1986년11월 서울 청계천 황학동에서 중고 전자제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자본금 300만원에 지하30여평의 공간에서다. 자본금이 적어 중고 흑백 TV 한 품목을 취급했다. 당시 중고 컬러TV는 가격이 제법 있어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지하 작업실 성격의 공간이라 소비자 판매가 힘들었다. 오토바이가 있는 세일즈맨들과 판매 계약을 맺어 고장 난 중고 흑백TV를 구입해 수리 및 세척을 거쳐 만든 상품을 서울 및 수도권에 있는 시장을 다니며 시장 상인 등을 상대로 현금판매를 하거나 고장 난 TV로 물물교환을 했다. 시장 상인은 TV가 고장 나도 수리할 시간이 없어 우리 영업 방식이 맞아 떨어졌다. 경우에 따라 고장 난 컬러TV로 교환해 오면 세일즈맨은 수익을 톡톡히 봤다. 수거된 중고 컬러TV는 모아서 자금력이 있는 큰 업체에 이익을 남기고 넘겼고 고장 난 신형 흑백TV는 수리와 세척을 거쳐 지방 중고 판매상 등에 도매로 납품을 했다. 열심히 일한 덕에 2년만에 판매장을 인수할 수 있었다. 중고TV 도매업이 잘되면서 수리할 일손이 절대 부족했다. 황학동시장에서 특급 기술자를 6개월이상 쫓아 다니며 우리 가게로 모셔왔다. 33년 전 주5일 근무에 350만원의 급여를 지급 했으니 적지 않은 투자였다.”
- 그때도 리퍼브 제품이란 개념이 있었나.
“당시엔 B, C등급이란 제품이 있었다. LG, 삼성, 대우전자에서 B, C급 제품은 사내 판매용으로 직원들에게 유통했고, 대우전자는 사내판매 후에도 재고가 남아 시장에 유통됐다. 중고시장이 항상 잘 되리란 보장이 없어 대우 사내 판매용을 취급했다. 처음엔 돈을 지급한 만큼 제품이 공급됐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제품이 공급 되지 않았다. 사기를 당한 거였다. 당시 액수가 13억원으로 지금 가치로 보면 400억~500억원정도 되는 것 같다.”
-회복이 쉽지 않았겠다.
“사업을 하다 보면 우여곡절이 있는데 15년전에도 어려움이 찾아왔다. 여신거래 및 유가증권(어음)거래가 관행이었고 은행에서 할인 융통한 어음이 부도처리 되는 바람에 사업장, 집, 차량 등이 모두 경매 처리되어 힘든 시기를 맞았다. 당시 채권자들은 이제 나는 사업을 할 수 없을 것이라 단언했고 사업장도 폐쇄했다. 하지만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만 있어도 장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당시 한여름 폭우가 쏟아지는 장마철인데 제품을 구매해서 하차 및 납품을 해야 하는데 그럴 공간이 없었다. 사업장 근처 고가 밑에 차량 등을 동원하여 입출고를 해야 했다.”
-사업을 하면서 에피소드 같은 건 없었나.
“1995년 대만으로 수출하는 전자제품 컨테이너 선이 부산 앞바다에서 좌초되면서 수 백개의 컨테이너가 바다에 빠졌다. 52개 컨테이너를 바다에서 건져 올려 공매처리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 했다. 대용량의 냉장고, 세탁기, 컬러TV, 컴퓨터, 모니터 등이 신품처럼 상태가 양호했다. 입찰에 당첨이 되었고 12월 한 겨울에 경기도 이천 농가 창고로 물건을 옮겼다. 냉장고, 세탁기 모터에 소금 덩어리가 꽉 차 있었고 녹일 수 있는 것은 물 밖에 없었다. 엄동설한에 냉장고, 세탁기에 설치되어있는 모터를 떼어 가마 솥에 넣어 불을 지펴 물을 끊여 녹였다. 모터를 수리해 겨우내 모두 팔았다. 이듬해 봄이 되니 소비자 항의가 빗발쳤다. 겨울이 지난 뒤 소비자들이 냉장고를 작동시켜보니 모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추후 제조 업체와 협의해 AS 및 반품수거 폐기처리로 마무리했다. 사기 당해 손해 본 것도 보전하고 팔자도 고치려 욕심부리다 더 큰 손실을 입을 뻔 했다. 이 사건으로 업계에서 배짱 좋은 놈으로 유명세를 타게 됐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올랜드라는 이름을 쓴 건 언제부터인가.
“올랜드아울렛은 12년전에 창업했다. 전국에 도매가 주가 되어 영업을 하다 보니 여신거래 및 어음으로 결제 받아 위험도가 높았다. 은행에서 차용해 상품을 구매한 후 여신 및 어음으로 결제 받으니 항상 자금에 몰리고 힘들었다. 리퍼브상품을 도매가격으로 현금 융통이 바로 가능한 소비자들을 상대로 판매한다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역발상을 해 봤다.”
-이름은 그럴싸하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뭐든지 다 있다는 뜻으로 올랜드(All Land)란 이름으로 결정했다. 저렴한 가격이 금세 입소문이 나서 제법 사업이 잘 되었고 방송국 작가가 소문을 듣고 촬영 제안을 했다. 그냥 싸게 판다는 것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그게 바로 ‘천원의 행복’과 ‘반의반 값’이란 이벤트이다.(지금은 ‘반의반의반값’으로 한다.) 당시 방송이 대박을 몰고 와서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현재는 파주본점을 비롯 직영점3곳, 전국에 체인점 18개가 있고 계속해서 체인점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 올해는 올소(ALL SO) 매장도 만들었다. 올소는 ‘올바른 소비를 지향하다’ ‘뭐든지 다 있소’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리퍼브상품은 중고품이랑 어떻게 다르나.
“중고는 소비자가 사용하다 나온 제품이고 리퍼브상품은 단종이나 잉여재고, 고객단순변심, 생산라인에서 미세한 규격미달품, 배송중 스크래치발생품, 모델하우스 전시품 등으로 사용하지 않은 상품을 말한다. 근자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2015년 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대회에서 잠시 사용했던 가전 가구 생활잡화 등을 독점 구매했다. 특히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나고 숙소에 사용했던 제품을 빼내야 입주민들이 입주할 수 있어서 5개월 동안 100여명이 합숙하며 11톤트럭 3,500여대 분량을 매입하여 판매했다. 필리핀, 미얀마, 몽고, 라오스 등에 수출도 했다.”
-리퍼브 업종이 지금 같은 불황에 적합해 보인다.
“올랜드가 잘 된다는 소문이 나니 작은 리퍼브샵이 많이 생겼다. 리퍼브제품은 나올 때만 나오고 그때그때 사서 창고에 보관해야 하니 자금력도 필요하고 물류창고 시스템도 잘 갖춰야 한다. 하루 아침에 되는 사업이 아니다. 가구나 소품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전자제품은 나름대로 노하우도 있어야 하고 제품을 보는 안목도 갖춰야 한다. 스마트폰 영향도 적지 않다. 가장 저렴하게 상품을 구매하는 게 사람들의 목표가 된 것 같다. 이미 리퍼브 시장의 규모가 거의 1조원에 이른다.”
-리퍼브 시장이 점점 커질 가능성이 있나.
“온라인, 홈쇼핑 등 시장이 커지면 커질수록 리퍼브 시장도 계속 커 나갈 수밖에 없다. 고객변심반품, 배송사고 제품, 재고 상품들도 더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올랜드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이 강점인 이유는
“제조사들도 온라인에서 정품을 판매하는데 우리가 온라인에 리퍼브 제품을 판매하면 정품 파는데 문제가 생긴다. 메이커들이 못하게 하기 때문에 온라인은 활성화 하는 게 한계가 있다. 정품을 팔아야 하는데 리퍼브 제품으로 싸게 나오면 안 팔리기 때문이다.”
-대형 백화점도 리퍼브샵 개념을 도입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이다. 워낙 사람들이 가성비 높은 걸 선호하니 그런 식으로 마케팅을 한다. 그런데 한계가 있다. 백화점은 싸게 팔 수 없는 구조다. 홈쇼핑도 마찬가지다. 단지 마케팅 전략으로 리퍼브샵 운운한다.”
-부유한 사람들도 리퍼브샵을 많이 이용한다.
“옛날에는 가구를 10년에서 20년 쓰려고 샀지만 이제는 가볍게 사서 싫증나면 바꾼다. 사이클이 빨라졌다. 그러다 보니 가격이 가벼운 쪽을 택하는 거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도 리퍼브 제품을 편안하게 구매한다.”
-온라인 쇼핑 몰과 비교했을 때 리퍼브 제품이 어느 정도 싸다고 볼 수 있나.
“품목에 따라 다르다. 생활 잡화는 온라인 대비 50~70% 정도 싸다. 식품은 40~60% 정도 싸다. 전자제품은 테스트하고 수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니 기술자가 필요하다. 인건비가 추가되어 아주 저렴하게 판매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기존 제품보다 많이 저렴하다. 거의 반 값 미만으로 살 수 있는 게 리퍼브 제품이다.”
-‘떨이몰’이나 ‘못생긴 과일’ 같은 품목은 친환경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 특히 ‘떨이몰’은 유통기간이 임박한 상품, 주로 식음료품을 취급한다. 기간이 임박한 것들은 빨리 털어 내야 하는데 잘 되는 편이다. 못생긴 과일 판매 같은 것은 옛날에는 비싼 광고료 때문에 감히 접근을 못했다. 시골에 있는 농부가 과일을 생산해 TV, 라디오, 신문 광고를 내면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요즘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인터넷 같은 여러 가지 매체로 접근할 수 있으니 올려 놓으면 된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좋다.”
-올랜드도 그런 부분에 기여를 하나.
“‘천원의 행복’이벤트가 그런 사례다. 응모권을 1,000원에 사서 당첨이 되면 가져가는 시스템이다. 수익금은 전액 불우이웃 돕기에 들어간다. 식품을 판매하다 보니 유통기한이 임박한 것들은 더 할인해 주는 거다. 어차피 버려야 될 것들을 활성화하는 방안이다.”
-여전히 리퍼브 제품의 질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지금은 인터넷이 활성화해서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댓글을 올린다. 그러면 우리는 치명타를 입는다. 당연히 전자제품 같은 경우도 1년간 무상 사후관리(AS)가 있고 가구도 불량이 난 것은 서비스를 해 줘야 한다. 그게 안 되면 문 닫아야 한다. 올랜드는 가전가구생활용품 등 검증된 유명브랜드 업체와 리퍼브상품 공급 계약으로 질 좋은 상품으로 원스톱쇼핑 공간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다른 중소 리퍼브샵도 그렇게 운영하나.
“작은 곳은 생겼다 없어지는 게 비일비재하다. 그런 걸 조심해야 한다. 업체가 공신력이 있느냐를 소비자 입장에선 고민해야 하고 서비스 부분도 리퍼브제품을 살 때는 반드시 계약서를 받아서 사인을 하는 형식으로 해야 자신의 권익을 찾을 수 있다. 소파를 예를 들면 상태가 어떤지 앉아보고 확인해야 한다. 기계적인 제품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리퍼브제품을 배달할 때 바꿔치기를 할 수도 있지 않나. 스마트폰으로 찍어 놓은 후 배달된 제품이 내가 찍어 놓은 제품과 맞는지 확인도 해야 한다.”
-앞으로 올랜도 리퍼브샵은 어떤 형태로 진화할 것 같나.
“리퍼브제품이 온라인에도 많이 올라와 있지만, 우리 매장은 원스톱 쇼핑이 될 수 있게 해 발품을 파는 사람의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리퍼브제품 매장은 소형 제품 위주로 해 단조롭다. 주차 공간도 협소하다. 하지만 우리 매장은 한 번에 모든 물건을 살 수 있다. 한 군데에서 편안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방식으로 발전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또 파주 프로방스 마을처럼 파주에 올랜드 아울렛 전시관과 휴식공간 등을 만들기 위해 5,000여평의 부지도 마련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는데, 대기업으로 가지 않고 청계천으로 갈 생각을 했나.
“사실 형이 청계천에서 유능한 기술자였다. 소아마비로 몸이 좀 불편했다. 형은 옛날 시골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뜯었다 고쳤다 하다가 아버지께 많이 혼났다. 일 끝나고 라디오 듣는 게 낙인데 형이 매번 망가뜨린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신기하게 고쳐놨다. 동네 사람들이 라디오가 고장 나면 우리 집으로 가져 왔다. 형 이름이 광원인데 첫 번째 창업 회사 이름이 광원전자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갔더니 월급을 괜찮게 줬다. 2~3년 도와주고 내 길을 갈 생각을 했다. 함께 창업해서 일주일에 3일은 밤샘을 했다. 창업 2년차 겨울에 형이랑 2박 3일 밤을 새워 일을 하고, 지친 상태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잤는데 형이 과로와 피로누적에 따른 급체로 돌아가셨다. 화장해 미사리 조정경기장에 뼛가루를 뿌리면서 이 분야에서 반드시 대한민국 1인자가 돼서 형의 꿈을 완성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조재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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