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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취향] “왕과 세자가 어찌 같은 그릇을 쓰느냐” 백자에도 위계 세운 세조

입력
2020.04.18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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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16> 세조의 백자 사랑 

마지막 어진화사 김은호(金殷鎬ㆍ1892-1979)가 그린 세조 어진. 1935년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의 어진을 모사할 당시의 초본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마지막 어진화사 김은호(金殷鎬ㆍ1892-1979)가 그린 세조 어진. 1935년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의 어진을 모사할 당시의 초본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고려의 도자기가 푸른빛의 청자(靑磁)로 대표된다면, 조선에는 우유 빛깔 백자(白磁)가 있다. 백자란 백토(白土)로 그릇의 형태를 만들고 그 표면에 투명한 유약을 입혀 1,300℃ 고온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말한다.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나 유교사상을 국교로 채택한 조선시대에 이르러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 백자의 담백하고 절제된 미는 성리학이 정착되고 내면의 도덕성을 중시한 조선의 이념과 잘 들어맞았다. 조선왕실 도자기 제작소인 경기도 광주 분원(分院) 백자는 1884년(고종 21)에 분원이 공소(貢所)로 전환되고 사실상 민영화될 때까지 500년간 굳건히 조선왕실의 공식그릇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조선왕실에도 백자를 사랑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제7대 임금 세조(1417~1468, 1455~1468 재위)이다. 세조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피의 군주 ‘수양대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문학과 활쏘기ㆍ말타기에 뛰어나고 천문ㆍ음악ㆍ수학ㆍ의술 등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왕이었다.

불교 진흥에도 힘을 쏟아 불경을 간행하는 기구인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한문본 불경과 이에 대한 한글 번역본(언해본ㆍ諺解本)을 발행하였다. 언해본에는 세조가 직접 번역하거나 토를 단 경우가 많아 문예군주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글쓰기에도 조예가 깊어 직접 쓴 글과 시를 매개로 신하와 소통하며 충심을 고무시키기도 하였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1년(세조 7) 6월 4일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만드는 데 공을 세운 우의정 이사철이 오랫동안 병으로 몸져누웠다가 차도를 보이자 세조는 소주 5병과 친히 시(詩)를 쓴 백자잔(화종ㆍ畫鐘)을 내려주었다. 백자에는 “경이 비록 나를 보고 웃을 것이나 내 박이 이미 익었으니 쪼개서 잔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어 충신에 대한 세조의 지극한 정(情)을 느낄 수 있다.

‘백자 청화 매조문 항아리’. 15~16세기 제작. 국보 170호. 순도가 높은 백색 항아리에 청화 안료로 매화와 대나무, 새를 그려 넣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자 청화 매조문 항아리’. 15~16세기 제작. 국보 170호. 순도가 높은 백색 항아리에 청화 안료로 매화와 대나무, 새를 그려 넣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세조가 재위하던 15세기는 이미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 도자 흐름이 청자에서 백자로 접어든 시기였다. 잘 깨지지 않아 실용적이었기 때문에 검약과 실질을 숭상한 조선의 새로운 방향과도 부합하였다. 특히 하얀 바탕에 푸른 문양이 수놓아진 청화백자(靑畫白磁)는 고급스러운 실용기이자 희소품으로 상류층의 향유 대상이 되었다.

당시 조선을 왕래했던 명의 사신들이 중국의 최대 도자 제작지인 경덕진 백자와 청화백자, 청자 등을 조선의 임금과 대신들에게 선물한 것도 관심과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며 1445년 도순감찰 김종서가 고령현에 들렀을 때 고령의 백자를 칭찬하며 선물로 받기를 원한다거나, 양반들이 술자리에서 사용하던 백자 술잔을 가져갈 정도였다 하니 실로 백자에 대한 인기를 가늠해볼 만하다.

15세기 중반 중국에서 들여온 청화백자에 대한 양반가의 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져, 1475년(성종 6)에는 중국의 청화자기는 가져오기가 어려운데도 서로 다투어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사대부의 집집마다 사용하는 현실을 꼬집으며 청화백자 쓰는 일을 일체 금지하게 하라는 상소(上疏)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백자가 제작된 곳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제작량도 많지 않았다. 백자에 대한 선망은 청화 안료와 백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재료의 중요성에 대해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이르러 왕실은 백토의 사용은 물론 그 산지까지 통제하고 이를 공조(工曹)와 승정원에서 각각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본격적 통제는 왕실과 관청의 독점적인 백자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청화백자는 백토로 도자기를 만들어 초벌구이를 한 뒤 회회청(回回靑)이라 부르는 코발트 광물 안료로 장식을 그리고 유약을 입혀 굽기 때문에 이 안료의 확보가 제작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산지에서 중국을 거쳐 조선에 수입되었으므로 매우 고가인 데다 수입이 원활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의 문신 성현은 자신의 수필집 ‘용재총화(慵齋叢話)’에 “회청은 드물고 귀하여 중국에 구하여도 많이 얻을 수 없다”며 조선에서는 중국산 청화 안료인 토청(土靑)조차 구할 수 없어 그림 그린 사기가 매우 적다고 언급하였다.

이처럼 매우 귀한 재료로 그려졌던 청화백자는 왕과 왕실 전유물로 궁중의 의례나 잔치 등을 위해 소수 제작되었고, 왕실 행사에서는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청화백자와 문양이 없는 백자가 차등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에 운영됐던 가마인 경기도 광주 우산리 2호 요지에서 출토된 백자 파편. 바닥에 새겨진 ‘내용(內用)’ 명문은 궁중용을 의미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5세기에 운영됐던 가마인 경기도 광주 우산리 2호 요지에서 출토된 백자 파편. 바닥에 새겨진 ‘내용(內用)’ 명문은 궁중용을 의미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한 세조였기에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왕위의 명분을 세우는 일은 평생의 업이 되었다. 세조는 유교 이념에 맞춰 누구나 갖기를 열망하던 백자를 철저히 신분에 따른 위계 질서 속에 편입시켰다.

일례로 1462년(세조 8) 왕과 세자의 그릇을 구분하지 않고 섞어 쓴 것에 대해 궐내 음식을 제공하는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의 별좌(別坐)를 엄하게 벌한 일이 있었다. 세조는 “아비와 아들이 그릇을 같이하고 임금과 신하가 그릇을 같이 하며 주인과 종이 그릇을 같이 하는 것이니, 명분이 어디에 있으며 야인(野人)들과 무엇이 다르겠냐”고 꾸짖고 더욱 조심하도록 일렀다.

이후 왕이 사용하는 그릇과 왕세자가 사용하는 그릇은 철저히 구분됐고, 제작 과정에서부터 그릇의 재질, 문양, 품질에도 차등을 뒀다. 백자 중에서도 최상의 백자는 오직 왕만이 쓸 수 있었으며, 왕세자는 백토로 빚은 도자기에 청색의 유약을 입혀 만든 청자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세조의 의지와 시대적인 배경에 힘입어 1467년경 궁중과 관청에서 사용할 전용 백자 제작소인 사옹원 분원이 설치되었다. 경기도 광주는 가마를 땔 때 필요한 수목이 무성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왕실이 있는 한양과 가깝고, 한강을 통해 백자를 조달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다.

또한 광주는 본래 양질의 백토 산지로 필수적인 재료 조달이 쉽고 1425년 세종대왕의 명에 따라 중국 사신 윤봉에게 줄 ‘백자장군’을 만들 정도로 이미 수준 높은 제작 능력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결과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운영된 분원 요장인 광주 우산리, 번천리, 도마리, 무갑리 등에서는 당대 최고 수준의 순도 높은 백자들이 생산되었다.

이 일대의 중심 가마에서는 소량의 청화백자와 함께 순백자 발, 대접, 접시와 같은 일상 그릇과 의례용 항아리, 편병(扁甁), 손잡이가 두 개 달린 양이잔(兩耳盞) 등 특수 기형의 백자 등이 발견된다. 조선왕실의 관리와 통제 아래, 관요(官窯)에서는 선별된 원료와 능숙한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왕실용 백자들이 만들어졌다.

현재 광주 남종면 분원리 분원초등학교가 위치한 곳은 조선의 마지막 관요터이다. 이곳에 세워진 공덕비에는 번조관의 이름과 업적 등을 칭송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국도자재단 제공
현재 광주 남종면 분원리 분원초등학교가 위치한 곳은 조선의 마지막 관요터이다. 이곳에 세워진 공덕비에는 번조관의 이름과 업적 등을 칭송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국도자재단 제공

왕실 가마인 관요 설치와 사옹원의 분원 운영은 새로운 도자기 제작 체계 확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왕실에서 조선백자의 흐름을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조선시대 백자의 생산이 얼마나 큰 국가적 사업이었는지 기록되어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사옹원 소속의 사기장(沙器匠)은 380명이 법정 인원이었고 전국에서 최고의 기술자로 선발된 천여명의 사기장이 삼교대로 차출되었다. 이들은 결빙기인 2~3개월을 제외하고 장기간 상주하며 자기를 제작하였다. 공식적으로 1만3,000개의 자기들이 봄ㆍ가을 두 차례에 걸쳐 진상되었고, 궁중의 잔치가 있을 때는 별도로 제작해 보내졌다.

왕실의 식기를 제작하는 곳인 만큼 사옹원의 책임자인 도제조는 대군이나 왕자, 의정부의 재상이 겸임했으며 제조와 부제조는 왕실의 종친들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봄·가을로 분원에 파견되어 분원의 관리와 백자 품질을 감독하였다.

청화백자의 문양은 궁중화가인 도화서의 화원이 전담하여 당대 화단의 화풍이 반영되어 있다. 매우 귀한 원료였던 만큼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능숙하게 그려내야만 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백자를 만들 수 있었던 국가는 청과 조선을 제외하고 그리 많지 않았다. 유럽도 1709년에 이르러서야 독일 마이센에서 연금술사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가 8년의 노력 끝에 고령토를 발견하고 백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15세기 중반 왕실의 주도로 설치된 분원은 당대 최고의 하이테크(high-tech) 기술인 도자 산업의 중추 기관이자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도자기 보급처가 되었다.

조선 백자의 정수인 분원 백자는 조선 왕실의 유교 이념에 부합하는 새로운 시대의 그릇이자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왕실의 도자기는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신분과 쓰임에 따라 문양과 장식을 달리하며 조선왕조 500년간 궁중의 곳곳에 채워졌다. 조선 백자의 맑고 투명한 백색과 당당한 자태는 성리학적 명문을 내세워 왕권강화를 추구한 세조의 격조 있는 통치 도구가 되었다.

곽희원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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