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일본인 기업가 손정의(63) 회장 중심의 소프트뱅크그룹이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인 15조원대 연간 영업적자를 냈다. 손 회장 주도의 세계 최대 벤처투자펀드 ‘비전펀드’의 손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탓이다. 113조원 규모의 비전펀드 부실이 심화할 경우 일본 굴지의 대기업인 소프트뱅크는 물론이고 세계 혁신산업 생태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전날 소프트뱅크는 2019회계연도(2019년 4월~2020년 3월) 실적 전망치 발표에서 영업손익이 1조3,500억엔(15조2,400억원) 적자에 달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직전 회계연도의 2조3,539억엔 흑자와 비교하면 실적 악화 수준이 심각하다. 순손익 역시 직전 회계연도의 1조4,111억엔 흑자에서 7,500억엔 적자로 전환됐다. 시가총액 기준 일본 3위 기업인 소프트뱅크가 연간 기준으로 영업적자와 순손실을 낸 건 15년 만이다.
소프트뱅크의 대규모 적자는 주로 투자 부문에서 발생했다. 특히 비전펀드에서 회사 전체 영업적자보다 큰 1조8,000억엔의 손실을 기록했다. 더구나 회계연도 1~3분기(2019년 4~12월) 8,000억엔이었던 비전펀드 누적 손실은 마지막 분기를 거치면서 1조엔가량 급증했다.
지난해 손실이 차량 공유업체인 우버의 주가 급락과 사무실 공유업체 위워크의 상장 실패 등 일부 대형 투자 대상 기업에서 비롯했다면, 올해는 코로나19 여파에 투자 기업 전반에 걸쳐 손실이 번지는 양상이다. 비전펀드가 10억달러(1조2,000억원)를 투자한 영국 위성통신 스타트업 원웹이 지난달 파산하고, 15억달러가 투입된 인도 스타트업 호텔체인 오요가 코로나발 여행객 급감으로 막대한 손실을 내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비전펀드의 투자 포트폴리오가 소비, 여행, 운송 등 코로나19 악영향을 크게 받는 업종에 집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에선 쿠팡이 2018년 비전펀드로부터 20억달러를 투자 받았다.
이에 손 회장과 소프트뱅크는 자구책을 내놓고 진화에 나섰다. 지난달 24일엔 회사 보유자산 4조5,000억엔어치를 팔아 재무 안정화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손 회장은 40억달러 규모의 개인대출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보유한 소프트뱅크 주식 중 60%를 담보로 제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비전펀드 운용을 맡았던 영미 지역 고위직들이 줄줄이 사퇴하고,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소프트뱅크 주식을 대량 매집한 뒤 주가 부양을 요구하는 등 내우외환은 계속되고 있다.
업계에선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비전펀드 손실이 지속될 경우 글로벌 정보기술(IT) 스타트업의 돈줄이 급속히 마를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세계 벤처투자 자금에서 비전펀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20~30%로 추정되는 점을 감안하면, 자칫 2000년 ‘IT 버블’에 버금가는 충격이 올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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