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색(色)의 우리말이다. 마시는 물과 소리는 같지만, 뜻이 다른 말이다. 순수한 우리말은 외래어와 한자어, 심지어 외국어에 눌려 힘을 못 쓰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 쉬는 모든 순간에 고유어에 휩싸여 살아간다. 미술시간에는 ‘물감’으로 하얀 종이를 채웠고, 가을이면 뜰 안의 봉숭아로 손톱에 ‘꽃물’을 들였다. 젊은이는 검은 머리를 화려하게, 연세가 지긋한 분은 흰머리를 검게 ‘물’ 들이며 자신을 가꾼다.
간혹 ‘물’이 나쁜 느낌으로 쓰일 때도 있다. 빨래하다가 흰옷에 다른 ‘물’이 들었다거나, 순수하던 아이가 ‘물’ 들었다고 할 때는 오염의 뜻으로 쓰인다. 자신의 아이를 신뢰하는 부모님들이 ‘물들어서...’라고 할 때는 제 바탕을 지켜주지 못한 아쉬움과 후회가 진하게 느껴진다. 동화책에는 무지개 그림이 종종 나온다. 선녀가 무지개를 건너 내려오고,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그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무지개는 비와 햇빛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것이라지만, 사람들 마음에서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다. ‘물’과 ‘지게’라는 고유어 둘의 합으로 보면 무지개는 ‘여러 색깔이 있는 문’으로 해석된다. 하늘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문이자, 하늘에서 내려올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길이다. 그래서 무지개가 뜨면 누구나 환호성을 보내나 보다.
봄이면 새로 돋는 꽃들에 땅이 물들고, 가을이면 선명한 하늘빛 아래 단풍이 물든다. 해가 솟아오르면 바다가 물들고, 해질녘엔 하늘이 붉게 물든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우리말에 물들어 지낸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들어 온 모국어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좋은 벗들의 올바른 말에 물들고 싶다.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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