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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표는 이번에 표를 잃은 이들을 대표해야 한다

입력
2020.04.15 04:3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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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이길보라 4ㆍ15 총선 기고

이길보라(코다, 영화감독, 작가)

※코다(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준말로 청각 장애인 아래 태어난 비장애인을 일컫는다.

누가 그랬다. 내 이익과 관련된 사람에게 투표할 거라고. 생경한 말이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한 번도 정치가 나를 대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늘 그랬다. 근현대사 교과서에 나오는 역대 대통령, 정치인은 기득권 남성이었다. 국회의원 후보로 나오는 이들은 나의 삶과는 동떨어진 남성, 40~60대, 비장애인, 상류층이었다.

학교에서는 대의정치를 가르쳤다. 나 대신 의제를 가지고 필요한 법을 만들고 국가재정을 관리하고 조사하는 일을 선거를 통해 맡기는 것. 그러나 나와 우리 가족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음성언어 대신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부모, 그 사이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며 살기를 선택한 30대인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정치인은 없었다. 정치에 무심해졌고 정치를 하는 이는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30대 코다 여성을 대변하는 정치는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콕 짚어 말하는 이들이 생겼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를 하겠다며 여성, 청년,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좋은 날이 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좋은 날을 직접 만들어내겠다는 이들이었다. 의제를 가지고 당을 만들어내고, 기탁금 모금 활동을 통해 어마어마한 돈을 모아 후보 등록을 해내고, 매일의 행보를 개인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지지자들에게 공유하고, SNS와 유튜브 방송, 닌텐도 동물의 숲 게임을 통해 유권자를 만나는 젊은 정치인들. 진입조차 불가능해 보였던 정치판에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들.

선거철에만 내 삶의 현장에 반짝하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동네 카페와 서점을 애용하는 후보들. 내가 향하는 집회 현장에 피켓을 들고 함께 서 있는 정치인. 이들의 행보를 지켜보는데 괜스레 눈물이 나왔다.

지난 10일 서울 행당1동 주민센터에 차려진 사전투표에서 유권자들이 줄 지어 투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배우한 기자
지난 10일 서울 행당1동 주민센터에 차려진 사전투표에서 유권자들이 줄 지어 투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배우한 기자

선거는 평등하다고들 한다. 모두가 1인 1표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와 투표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지 않다. 이번 선거는 더더욱 그렇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재외 선거인의 약 절반 정도인 8만여 명이 투표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에게 마땅히 제공되어야 하는 수어 영상 선거공보물이 제작되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나 장애인은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에 투표소에 가길 꺼린다.

◇선거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나 역시 귀국하지 못했을 것이고 투표 역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 있는 지인들은 재외 선거 직전 참정권을 뺏겼다.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부모는 수어로 통역된 선거 공약 영상이 없어 문자언어로 되어 있는 선거공보물을 읽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령인 할머니는 바이러스 걸릴까 무서워 투표소에 가지 못하겠다고 한다. 가장 먼저 참정권을 잃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

평등 선거라고 말하는 제도는 사실 평등하지 않으며 이번 선거는 더더욱 그렇다. 꼼수로 만든 위성정당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고, 거대 정당이 작은 정당들에게 선거연합 제안을 했다. 그러는 사이 작은 정당들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살다 살다 이런 선거는 처음이라고, 엉망진창인 이번 선거에 투표하지 않음으로써 뜻을 보여줄 거라고들 한다. 아니다. 당신의 표는 이번에 표를 잃은 이들을, 처음부터 표가 없었던 이들을 대신해야 한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장애인, 이주민, 기후 위기, 동물과 식물, 지구. 권리를 뺏겼거나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비참을 겪은 이들이여 투표하라

뒤집어야 한다. 처음부터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게 설계되었던 이 판을. 그걸 하겠다고 여성이, 청년이, 장애인이, 이주민이, 성소수자가 나섰다. 바꾸자.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더 잘 살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투표소에 가자. 이제 믿어보려 한다. 정치가 세상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정치를 하는 사람은 타고 나는 게 아니라 내 친구들, 동료들일 수도 있다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고, 장애인 가정에서 자랐기에 끊임없이 정상성을 요구받고,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어리기 때문에 지워지고, 가난하기 때문에 비참해지는 경험을 공유한 이들이 국회에 서서 나의 언어로 나를 대변할 것이라고. 내가 바라왔던 그 좋은 날을 그들이, 우리가 직접 만들어낼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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