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화이트스타 라인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 RMS 타이타닉호는 1912년 4월 14일 밤 11시40분 초대형 빙산에 충돌해 15일 새벽 2시20분 완전히 가라앉았다. 0시45분부터 시작된 구명정 탈출은 침몰 5분 전까지 이어졌다. 1,514명이 숨졌고, 706명이 구조됐다. 일본인 승객 호소노 마사부미(細野 正文, 1870~1939)는 살아 남았다. 하지만 그 행운 때문에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고통받았다.
일본 니가타 현 출신인 그는 히토츠바시대학 전신인 도쿄고등상업학교를 졸업, 일본제국철도 등 몇몇 기업을 거쳐 1907년 교통부 철도공무원이 됐다. 도쿄대 외국어학과에서 러시아어를 익힌 그는 1910년 러시아 철도시스템 연구원으로 파견됐고, 2년 뒤인 12년 귀국했다. 그에게 타이타닉호는 영국-뉴욕을 거쳐야 하던 고국행 귀국선이었고, 도쿄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타이타닉 생존자인 그는 ‘행운의 남자’로 불리며 요미우리 등 여러 신문, 잡지와 인터뷰했다. 하지만 얼마 뒤 사태가 표변했다. 10번 구명정의 한 생존자(Archibald Gracie)가 사고 기록을 책으로 내면서 “한 일본인 승객이 여성과 아이들을 밀쳐내고 구명정에 ‘무단승선(stowaway)’했다”는 주장을 제기한 거였다. 마사부미는 유일한 일본인 승객이었다. 미 상원 청문회에서 구명정 승무원들도 아동ㆍ여성 우선 탑승 원칙을 재확인하며 일부 남성이 여성인 척 위장한 예가 있다고도 발언했다. 마사부미는 명예를 목숨보다 중시한다는 일본 사무라이 정신을 저버린 수치의 대명사가 됐다. 그는 이듬해 교통부에서 해고됐다가 부득이한 필요 때문에 복직됐지만, 그와 가족은 실로 긴 세월 동안 손가락질과 따돌림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진실을 항변하지 않았다.
진실은 1997년 영화 ‘타이타닉호’ 개봉을 전후해 이뤄진 사고 재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그를 ‘무단승차자’라고 고발했던 필자와 그가 다른 구명보트를 탄 사실이 결정적이었다. 사고-침몰의 그 짧은 순간에, 칠흑 같은 어둠의 아비규환 속에서 그가 명예로운 죽음을 다짐하며 아내에게 쓴 유서도 공개됐다.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의 진실과는 다른 진실, 즉 살아남았다는 진실 앞에서 스스로 괴로워했다. 허위 주장을 근거로 그를 비난한 이들 가운데 그의 무덤 앞에서나마 공개 사죄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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