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예상 못했다. 지구촌 유일 초강대국이, 안정적인 공공의료체계를 자랑하던 유럽 주요국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이토록 속절없이 무너질 줄이야. 그래도 경쟁적으로 전 세계를 호령해온 나라들인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이 현실화하면서 크게 두 가지 대목에서 이른바 서방 선진국들의 민낯이 드러났다. 하나는 지난 20~30년간 지구촌 전체를 무한경쟁과 효율 지상주의로 몰아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체다. 다른 하나는 모두가 그토록 강조해온 글로벌 협력ㆍ공존이 위기 상황에선 언제든 공염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선진국들이 코로나19 사태로 휘청이는 가장 큰 이유로는 역설적이게도 공공의료체계가 꼽힌다. 미국은 “목숨이 재산과 소득에 달린 국가”(앨리슨 갈바니 예일대 감염병 모델분석센터장)가 된 지 오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상징하던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 소속 의료진의 40% 가까이가 해외인력인 게 지속적인 비용 감축의 결과라는 건 그야말로 ‘상징적’이다. 선진국들도 보건ㆍ의료시스템이 열악한 남미ㆍ아시아 국가들처럼 체육관ㆍ공원 등에 임시병상을 차리고 있다. 프랑스만 해도 지난 20년간 공공의료 재정 축소로 사라진 병상 수가 10만개에 달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최근 “2분기 전 세계 노동시장에 정규직 일자리 2억개가 사라지는 정도의 충격이 가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해고 천국’ 미국에선 이미 실업수당 신청이 1,600만건을 넘어섰다.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해고는 곧 삶의 기반이 해체되는 것이지만 미국의 대응은 사후 실업수당 인상이다. 그나마 유럽은 아직까지는 정리해고 방지와 고용 유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 속에 한계기업들이 나타나자 그간 민영화를 금과옥조로 떠받들던 서방 선진국들이 돌연 ‘국유화’를 얘기한다. 유럽의 역사에 비춰 이탈리아의 항공사 국유화 선언, 프랑스의 일부 대기업 국유화 가능성 거론, 스페인의 의료기관 국유화 추진 등은 그래도 아주 생뚱맞진 않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기업 지분 인수 가능성 운운은 참으로 낯설다.
코로나19 사태는 전 세계의 공통 가치로 여겨져 온 국가ㆍ계급ㆍ계층 간 협력과 연대가 현실에선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새삼 일깨웠다.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를 내건 트럼프 대통령이야 그렇다 쳐도 유럽연합(EU) 회원국들까지 봉쇄ㆍ통제 경쟁으로 내달렸으니 말이다. 게다가 명색이 선진국들끼리 마스크 가로채기니 의료물자 수출 금지니 하며 비난전을 벌이는 모습이란.
이런 상황에선 ‘사회적 거리두기’조차 사치인 세계 각지의 난민촌과 빈민촌 거주자, 저임금 이주노동자와 ‘비공식 부문’ 노동자 등이 감염과 실직 위험에 한꺼번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구촌 전체의 물적ㆍ인적 교류의 규모와 경제적 상호의존도 등을 감안할 때 이들이 연대와 협력과 지원 대신 배제와 외면에 직면한 결과는 머잖아 선진국들에게 부메랑이 될 것이란 점도 자명하다.
유럽 몇몇 국가들이 자국 내 상황이 진정된다는 판단에 따라 각종 통제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수치상으로 가장 심각한 미국조차 연일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와 경제활동 정상화 의지를 강조한다. 물론 공장이 멈추고 일상 소비가 끊긴 기간이 길어지면 그 자체로 재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또 다시 개별국가의 ‘결단’ 경쟁이어선 곤란하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명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전염병에 승리하려면 글로벌 연대의 길을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주요국들의 조정ㆍ협력 없이는, 선진 각국이 내부 취약계층과 개발도상국 지원에 나서지 않으면 전파력 강한 바이러스를 상대하기 버겁다는 게 이미 확인됐다. 중국이 우한을 전면봉쇄할 때 사실상 뒷짐졌던 서방 국가들 중 ‘미국의 경제 심장’ 뉴욕의 지금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양정대 국제부장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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