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37년 차 배우의 내공은 달랐다. 1983년 영화 '스무해 첫째날'로 데뷔한 김희애가 2020년 드라마 '부부의 세계'로 독보적 여배우의 존재감을 과시 중이다. 시청자들은 김희애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에 숨을 죽이고 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면서도 잔뜩 독기가 서린 눈빛 연기가 그야말로 압권이다.
김희애는 지난달 27일 방영을 시작한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 지선우를 연기하고 있다. 교사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유복하게 자라다가 열일곱에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정글 같은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강인한 생존력을 길렀고, 가시를 세우고 사느라 다른 사람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은 인물이다.
사랑 받는 아내와 완벽한 엄마로 살고 있다고 믿었지만,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며 견고한 믿음이 깨진다. 신경과민과 강박 증세가 지선우를 덮쳐오지만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는 불륜녀의 머리채를 잡기보다는 영리하고 이성적인 복수를 계획했다.
지난 10일 방송에서 지선우는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남편 이태오(박해준)를 데리고 불륜녀 여다경(한소희)의 부모님 집에 찾아간 지선우는 평화로운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과감한 폭로를 한다. 여다경 엄마를 향해 "댁 따님이 내 남편이랑 바람을 펴서 임신했다"고 말한 것. 분노하는 남편을 향해 그의 친구 손제혁(김영민)과 외도를 한 사실을 뻔뻔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부부의 끈을 자르기로 결심한 지선우는 감춰온 복수 의지를 실행에 옮겼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실감나는 명장면이 탄생했다. 김희애의 조소가 섞인 냉랭한 눈빛 그 와중에도 드러나는 마음의 상처가 한꺼번에 휘몰아쳐 안방극장에 폭발적 긴장감을 선사했다.
김희애는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탑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선 딸을 잃고 살아가는 현숙을 실감나게 연기해 감동을 전했고, '사라진 밤'에선 남편에게 살해당한 설희로 분해 장르를 넘나드는 연기력을 과시했다.
또한 '허스토리'에선 관부 재판을 이끄는 원고단의 단장 문정숙 역을 맡아 강인한 캐릭터로 변신, 여우주연상을 3회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JTBC 드라마 '밀회' 역시 김희애가 '갓희애'로 불리게 만든 작품이다. 20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 커리어우먼 오혜원으로 분해 파격적인 멜로 연기를 보여줬다. 멜로 대가답게 스크린에서도 존재감을 빛냈다. 영화 '윤희에게'에서 첫사랑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윤희 역을 맡은 그는 섬세한 연기로 수많은 주부들의 가슴을 울렸다.
김희애는 과거 기자와 인터뷰에서 "배우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대리만족을 할 수 있어 행운아인 거 같다. 멋진 인생을 살아본 게 좋았다"고 털어놨다.
어린 나이에 데뷔한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사실 위로를 많이 해주고 싶다. 말도 못하게 고생했다. 어릴 때부터 시행착오도 많이 겪고 어두운 시절을 겪어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그러나 누구는 고생을 안 하겠나. 힘든 시절이 있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다"며 웃었다.
김희애의 연기력에 찬사가 쏟아지는 건 인생을 꾹꾹 눌러 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유수경 기자 uu8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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