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스쿨미투' 집회에 나온 10대 여성. ⓒ김희지

책은 ‘여성’ 이야기다. 알쏭달쏭한 제목 ‘원본 없는 판타지’는 여성의 메타포로 읽힌다. 판타지는 현실에 영향을 주는 현실의 그림자이고, 문화는 그 판타지를 다시 만들려는 시도다. 여성이라는 게 그런 구성적 개념이다. 협애한 인식과 규범 틀에 가둬지지 않는다.

책의 메시지는 선명하다. 퀴어, 그러니까 소수자를 소외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퀴어는 실존하되 망각된 존재다. 존재의 세계에는 언제나 인식 체계로 해석되지 않는 사각(死角)이 있게 마련이었고, 좌절은 ‘응당 그래야 한다’는 식의 강박을 낳았다. 규범의 탄생이다. 책은 “지배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모든 기이하고 번역 불가능한 비규범적 실천들”을 역사 속에서 찾아내 담는다.

여성은 퀴어의 대표 선수다. 성별 범주 자체가 그랬다. 남성은 원본, 여성은 판타지였다. 그러나 “생물학적 여성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재현만을 ‘여성서사’로 규정하려는 본질주의적 주장”은 멀쩡한 페미니즘이 아니다. 저자들은 환원주의를 경계한다. 소수자는 여성만이 아니다. 일단 성별과 성 정체성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일부가 트랜스젠더다. 또 이성애뿐 아니라 동성애나 양성애 같은 성적 선호(sexual preference)도 있다.

1986, 1987년 '학생 가장 돕기' 부산 공연 티켓. 여기서도 '톰보이' 이선희는 바지 한복을 입고 있다. 한채윤 제공

페미니즘이 해방시켜야 하는 대상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억눌리고 인정되지 못하고 외면되고 차별되고 배제되고 혐오된 것들이다. 저자들은 밝힌다. “책의 가장 원대한 야심 중 하나는 기존 문화사의 성적 배치, 즉 남자와 여자, 이성애자와 비이성애자,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의 위치를 그저 기계적으로 뒤바꾸는 것을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이자 유일한 방법론으로 간주하는 게으르고 편협한 사고를 단호히 물리치는 것이다.”

왜 이 책인가. 저자 중 한 명인 영화연구자 손희정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2017년 대선 후보 문재인의 선언은 정치적 수사로 판명되고 말았다고 혹평한다. “그에게는 20~40대 여성들 표심을 못 잡으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을 거라는 현실 감각은 있었지만 페미니스트 정치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포퓰리스트일 뿐이라는 뜻이다. “동성애 문제는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는 청와대 대변인 출신 더불어민주당 총선 후보 고민정의 유보적 대답이 다시 정권의 보수성을 드러낸다.

2018년 초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라는 제목으로 10회에 걸쳐 진행된 강좌가 책의 바탕이다. 당시는 2017년 ‘미투(#MeToo) 운동’으로 페미니즘이 문화 비평의 핵심 인식 틀로 부상했던 시기다.

원본 없는 판타지
오혜진 등 14명 지음
후마니타스 발행ㆍ600쪽ㆍ2만5,000원

섬세한 언어로 쓰인 익숙지 않은 비공식 역사의 의미를 포착하기가 쉽지는 않다. 결실을 보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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