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 제도이다. 단, 지금껏 역사적으로 시도된 다른 모든 제도를 논외로 한다면.”
영국 총리를 지낸 20세기 대표 정치가 윈스터 처칠의 말이다. 민주주의의 유용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칭찬이면서, 한편으론 민주주의가 완벽한 절대선은 아니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이미 전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는 붕괴 위기에 처해 있다. 극단의 분열과 혐오를 연료로 삼는 포퓰리즘이 활개를 치고, 권위주의 정치인이 대세가 됐다. 한국도 뒤지지 않는다. 촛불혁명이란 찬사가 무색해졌을 만큼 정치와 시민은 괴리됐고, 그 자리엔 냉소와 혐오, 불신이 가득 찼다.
그렇다고 아무런 대안도 없이 민주주의를 버릴 순 없다. 당장 닷새 앞으로 다가온 4ㆍ15 총선은 고사 직전의 민주주의의 숨결을 불어넣어줄 심폐소생술이 될 수 있다.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전에 민주주의와 정치, 선거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읽어보자. 이번 주에 나온 정치 관련 신간 2권과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에게 추천 받은 책들을 함께 소개한다.
◇껍데기만 남은 민주주의에 안도하지 말라
현대 민주주의 위기의 특징은, 겉모습은 너무 멀쩡하다는 거다. 선거는 꼬박 꼬박 치러지고,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법과 제도는 견고하다. 영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 캠브리지대 교수는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에서 21세기 민주주의의 위협 요소를 거론하며 은밀하게 진행되는 쿠데타를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흔히 쿠데타라고 하면 군이 정치에 개입해 국가 전복에 나서는 걸 떠올린다. 하지만 성숙한 민주국가에서도 쿠데타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ㆍ최이현 옮김
아날로그 발행ㆍ323쪽ㆍ1만6,000원
저자는 일부 엘리트 권력집단이 민주주의 제도를 악용해 권력을 획득하는 현상도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종 쿠데타에 빗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말만 앞세우는 헛된 공약의 남발, 집권 세력의 행정권 남용, 정치공학과 음모론 등 전략적 선거 조작이 판치는 선거에서 시민은 수동적인 구경꾼, 청중으로 전락한다.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격이다. 저자는 이를 ‘좀비 민주주의’라 칭한다. 선거 승리를 위해서라면 원칙과 신념을 다 내팽개치고 위성비례정당을 만든 한국의 거대 양당의 꼼수가 어른거린다.
김호기 교수가 추천한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어크로스)’와 ‘위험한 민주주의(와이즈베리)’도 비슷한 진단을 내놓는다. ‘어떻게 민주주의…’의 두 저자 미국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는 현대 사회의 독재는 총부리가 아닌 선출된 지도자에서 나온다고 분석한다.
사법부를 장악하고, 자기 세력을 권력 주변에 심고, 게임의 룰을 바꿔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어 상대편을 무력화하는 방식이다. ‘위험한 민주주의’의 저자 야스차 뭉크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혐오, 극단적 진영 논리, 가짜 뉴스 등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가 ‘포퓰리즘 모멘트’에 돌입했다고 경고한다.
◇책임 있는 정치적 소비자,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정치인들에게 스스로의 변화를 기대하기란 난망이다. 결국 유권자인 시민들이 또 나서야 한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에서 왜곡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한국에서도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소비자의 이념적, 정치적, 윤리적 신념과 결부시켜 특정 상품의 소비를 거부하거나 지지하는 정치적 행위를 말한다. 사적 욕구를 지향하는 소비자가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과는 같을 수 없지 않냐는 지적과 우려도 분명 있다.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발행ㆍ296쪽ㆍ1만5,000원
하지만 강 교수는 “명분을 내세운 시민이 명분을 내세우지 않는 소비자보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다분히 허구적인 시민 우위론을 내세운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투표가 요식행위일 뿐이라고, 냉소하는 시민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소비자로 거듭나자는 제안이다. 결국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사회 참여의 방식을 다양화한다는 데 있다. 그런 새로운 변화가 정쟁에만 몰두하는 정치를 끝내고 민생을 돌볼 수 있는 개혁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조언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추천한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나무연필)’ 역시 선거에 참여하는 시민의 선택을 고민해볼 수 있는 책이다.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은 점차 퇴보하는 회사와 조직, 국가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이탈(exit)’과 ‘항의(voice)’라는 정치 행위를 조화롭게 선보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은 항의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전망이 보일 때, 이탈을 대체해 항의를 적극적으로 선택한다.
하지만 항의가 과하면 안정적인 민주주의에 부담으로 다가와 퇴보를 앞당길 수도 있다. 충성심도 변수인데, 항의와 이탈 자체를 가로 막아 조직의 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내용도 있다. 표를 구하는 정당과 후보자의 입장에선 매우 의미심장한 제목의 책이 아닐 수 없다.
바람직한 정치인의 덕목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김 교수는 2권의 책을 권했다. 먼저 일본 만화계의 거장 마츠모토 타이요의 ‘죽도 사무라이(애니북스)’는 에도 시대 정처 없이 떠돌던 낭인 사무라이가 고난과 방황을 거치며 군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정치의 본질을 꿰뚫은 고전, 막스 베버의 ‘소명(직업)으로서의 정치’도 있다. 물론 베버가 정치인의 덕목으로 언급한, 열정과 책임의식, 균형감각 삼박자를 겸비한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을 터. 그래도 투표는 하자. 나와 내 가족, 더 나아가 우리 공동체의 오늘과 내일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희망하면서.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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