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대학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윤모(39)씨는 2년 전 가입한 은행 적금을 고심 끝에 해지했다. 코로나19 여파로 매출이 반으로 줄어 공과금 등 유지비를 내고 나니 당장 생활비를 걱정할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윤씨는 “만기가 반년 밖에 안 남았고 금리도 2%로 나쁘지 않았지만, 언제 나올지 모르는 정부 대출만 기다릴 순 없었다”고 말했다.
가계 경제에도 코로나19 여파가 무섭게 번지고 있다. 금융회사에서 가입한 예적금과 보험을 깨고 현금을 찾아가는 사람이 대폭 늘어난 것이다. 미래를 대비해 모아둔 여윳돈을 당장 찾아야 할 만큼 가계에 불어 닥친 불황의 그림자가 심상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장 쓸 돈 급해… 예적금 9조원 해지
8일 신한ㆍKB국민ㆍ하나ㆍ우리ㆍNH농협은행 등 5개 시중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개인 명의 정기 예적금 중도해지 건수는 80만721건으로 조사됐다. 코로나19 여파가 본격화 하기 직전인 올 1월(67만5,486건)보다 18.5%, 1년 전 같은 달(55만8,218건)과 비교하면 43.4%나 늘었다. A은행의 경우 해지 건수가 작년 3월 7만건에서 올해는 14만건으로 2배나 뛰었다. 금액으로 계산하면 5대 은행에서 해지한 예적금은 총 9조3,433억원에 달했다. 작년 3월(5조7,794억원)보다 61.6%나 늘어난 수치다.
예금이나 적금은 당장 쓸 일이 없는 목돈이나 정기적인 소득의 일부를 가입하는 데다 중도 해지에 따른 이자 손해가 크다. 만기 전 예적금을 해지하면 만기를 채웠을 때 약정 금리의 10~80%밖에 받지 못하고, 우대금리도 사라진다.
이 때문에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면 먼저 주식, 펀드 등의 금융자산을 정리하고 예적금은 가급적 손을 대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생활비나 대출이자 부담 등으로 급전이 필요한 한계상황에 내몰린 가계나 자영업자들이 손해를 감수하고 해지에 나서고 있는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납입 유예 조치도 검토해야”
보험을 해지하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대형 생명보험사 3곳(삼성ㆍ한화ㆍ교보생명)의 1,2월 해약환급금은 2조8,151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5.69% 늘었다. 코로나19 확산이 본격 시작된 2월만 본다면 17%나 급증했다. 5대 손해보험사(삼성ㆍ현대ㆍDBㆍKBㆍ메리츠화재) 역시 2월에만 장기보험에서 전년보다 22% 늘어난 8,979억원의 해약환급금을 지급했다.
해약환급금은 만기가 다가오기 전에 보험 가입자가 계약을 깨고 찾아간 돈이다. 보험사로부터 운영비와 해약공제액을 제외하고 돌려받기 때문에 원금손실이 불가피하다. 금융권 관계자는 “예적금이나 보험은 미래의 안전판이자 재테크의 최후 보루”라며 “소득 감소로 매월 내야 하는 보험료가 부담스러워졌거나 당장 유동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 같은 분위기가 단기간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내수경기 둔화로 당장 가계소득 증가를 기대하기 어려운데다, 코로나19에 따른 실물경제 침체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해지 사례가 더 늘어날 수 있다. 이석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코로나19에 따른 수입 및 소득 감소로 보험료 납입 등이 어려운 가입자에 대해 일정기간 납입을 적극적으로 유예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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