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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삽화=신동준 기자

1989년 7월 21세 배우 레베카 셰퍼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해됐다. 범인은 19세 남성 로버트 존 바르도. 여성 평화운동가를 스토킹하던 바르도는 그 여성이 사고로 죽자 집착 대상을 셰퍼로 바꿨다. 그는 3년간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거나 칼을 지닌 채 셰퍼의 촬영장을 찾다가, 결국 탐정을 통해 주소를 알아내고 셰퍼의 집으로 향했다. 첫 방문에서 거절 당하자, 1시간 뒤 다시 돌아와 셰퍼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 사건에서도 스토커를 저지할 결정적 계기들은 수 차례 무시됐다. 비정상적 편지 공세를 누군가 수상히 여겨 신고했다면, 바르도가 촬영장을 찾았을 때 잡혔다면, 탐정의 개인정보 수집이 규제됐더라면, 첫 방문에서 경찰이 출동했다면, 셰퍼는 살았을 것이다.

스토킹은 다른 범죄를 예고하는 전조이자 더 큰 범죄의 동기다. 애정 집착 질투 등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스토킹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동반한다. 모든 스토킹이 중범죄로 이어지진 않지만, 일단 스토킹이 시작되면 강력범죄로 전이될 개연성은 유의미하게 높아진다.

그 본질이 ‘의사에 반해 지속적으로 남에게 접촉하려는 행위’라는 점에서, 스토킹은 중범죄의 씨앗을 품고 있다. 피해자와의 접촉이 거절 당하면, 미행하거나 불법행위를 통해 주소나 연락처를 얻는다. 스토커는 이 정보로 피해자 주거지에 침입하거나 피해자를 협박ㆍ폭행할 수 있다. 피해자가 저항하면 납치ㆍ감금을 통해 의지를 관철하려 든다. 심각한 경우 성폭력이나 살인 시도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인과관계는 통계로도 입증됐다. 한민경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이 범죄피해자 조사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스토킹 피해 경험이 있는 때 성폭력 피해를 당할 위험은 약 13배 높다. 영국 글로스터셔 대학 연구팀이 조사한 살인사건 358건 중 94%에서 스토킹과 관련된 행위가 발견됐다.

스토킹이 강력범죄의 징후일 수 있다는 점은 명백하지만, 스토킹을 초기에 막을 법적 장치나 스토커를 효과적으로 감시ㆍ차단할 수단은 사실상 없다. 스토킹 행위가 형법에 규정된 범죄로 발전되지 않는 한, 현행법상 단순 스토킹을 막을 수단은 경범죄처벌법이 유일하다. 괴롭힘이 물리력 행사로 이어지더라도, 기껏해야 형량이 미미한 협박죄,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주거침입 정도로밖에 처벌할 수 없다. 단순 스토킹이 물리력 행사를 거쳐 강력범죄에 이르기 직전까지, 공권력의 제지를 거의 받지 않는 셈이다.

30년 전 레베카 셰퍼 사건 이후 미국은 주(州)별로 스토킹 방지법을 제정하며 대책 수립에 나섰지만, 한국은 스토킹 법안을 20년간 방치했다. 최근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과 접촉한 사회복무요원이 고교 담임교사를 8년간 집요하게 괴롭힌 사례만 봐도, 우리가 스토킹 피해자의 고통을 얼마나 과소평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제자의 탈을 쓴 이 스토커는 처음엔 ‘소년’이라는 이유로 처벌 대신 보호처분을 받았다. 이후 실형을 살았지만, 출소 후 어이없게도 개인정보를 담당하는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하며 교사의 개인정보를 또 빼냈다.

다른 범죄와 달리 스토킹에 수반된 범죄들은 꽤나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형태로 암시나 징조를 남긴다. 그렇기에 스토킹 행위에 초기부터 효과적이고 강력한 대응을 할 수 있다면, 여러 형태의 비극을 사전에 예방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래서 스토킹 방지법은 21대 국회가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처리해야 할 법안 중 하나다. 스토킹 처벌만 강화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신고, 초동대응, 차단, 감시 등 피해자를 보호ㆍ지원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가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촘촘한 법망이 필요하다.

비극이 닥치고서야 부랴부랴 제도적 장치 마련에 나서는 실책을 이번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스토킹 방지법까지 사람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이영창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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