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국 영화계에서 좀비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한국형 좀비 영화의 효시로 꼽히는 ‘괴시’(1981) 이후 20년 넘게 후계자가 없었다. 2006년 ‘죽음의 숲-어느 날 갑자기 네번째 이야기’가 겨우 명맥을 이었다.
2010년에 좀비 영화 2편(‘이웃집 좀비’와 ‘미스터 좀비’)이 개봉하는 이변이 일어났지만 저예산 독립영화였다. ‘이웃집 좀비’는 여섯 개 단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였다. 척박한 환경에서 좀비물을 만든 게 어디냐는 평가가 있었으나 엉성한 좀비 분장이 혹평 받았다. ‘미스터 좀비’는 무기력한 치킨집 사장이 좀비에게 물린 후 괴력을 얻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조잡한 완성도로 관객 호응을 얻진 못했다. ‘이웃집 좀비’의 관객은 3,000명 남짓, ‘미스터 좀비’는 100명대였다. 2014년 나온 ‘좀비스쿨’ 역시 7,700명 가량의 관객을 모으는데 그쳤다. 좀비 영화는 한국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더 강해질 만했다.
좀비물은 최근 한국 대중문화의 대표 신상품이 됐다. 넷플릭스 ‘킹덤’ 시리즈는 해외에서도 큰 인기다. K좀비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다. 1,000만 영화 ‘부산행’(2016)이 기폭제였다. 국내에서 흥행했을 뿐만 아니라 156개국에 수출되며 한국형 좀비물의 유행을 선도했다. 조선판 좀비가 등장하는 ‘창궐’(2018)의 판권은 74개국에 판매됐는데, ‘부산행’의 후광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총제작비(마케팅비 등 포함) 170억원대 대작 ‘창궐’은 해외 판매 실적이 무색하게 국내 관객 160만명에 그쳤다.
조선을 배경을 한 ‘창궐’과 ‘킹덤’은 공통점이 여럿이다. ‘창궐’의 주인공인 이청(현빈)과 ‘킹덤’의 중심 인물 이창(주지훈)은 조선 왕자다. 이들은 좀비와 맞서 싸우며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성장한다. 세도가가 왕실을 쥐락펴락하고, 정치적 야심을 위해 좀비 창궐을 유발한다는 공통분모도 지녔다. 조선 궁궐을 배경으로 액션이 펼쳐지기도 한다. 좀비물이라는 익숙한 장르에 조선이라는 이국적 배경이 포개지니 해외 관객의 눈길을 잡을 만하다. ‘창궐’과 ‘킹덤’은 좀비로 변한 왕을 묘사하기도 한다. 괴성을 지르며 관절을 꺾는 왕의 모습은 파격이다. 엄숙 근엄 진지의 표상인 조선 왕을 이처럼 장르적으로 활용한 경우는 거의 없다. K좀비가 얼마나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K좀비의 등장과 진화는 한국 경제의 압축성장까지 연상시킨다.
몸은 움직이나 정신은 죽은 상태인 좀비는 현대사회의 지옥도를 표현하는 메타포로 종종 소환된다. 대중이 선전선동에 넘어가거나 편견과 선입견에 휩쓸려 누군가를 득달 같이 물어뜯는 행위는 좀비나 다름 없어서다. 세계 영화사에 기념비적인 좀비물로 평가 받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도 좀비를 통해 원자력에 대한 공포를 환기시키고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비판했다. 올 여름엔 ‘부산행’의 4년 뒤 이야기를 다룬 총제작비 190억원대의 ‘반도’가 개봉한다. 좀비물이 각광 받는 한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은 무엇일까. 우리는 답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