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마약과의 전쟁’ 당시 범죄자들을 즉결 처형해 악명을 떨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공포정치가 다시 시작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봉쇄령 위반자를 사살하라”는 극약 처방을 내린 지 삼일 만에 실제로 자국민 사살이 현실화한 것이다. 현지에선 코로나19 대응 방식에 불만이 많은 자국 여론을 누르기 위한 ‘보여주기식’ 강경책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6일 필리핀스타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필리핀 남부 아구산 델 노르테주(州) 검문소에서 근무하던 한 경찰관이 지난 4일 63세 남성 A씨를 향해 실탄을 발사해 A씨가 현장에서 사망했다. 술에 취한 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이동하던 A씨가 이를 지적한 경찰관에게 낫을 휘두르며 항의하자 즉각 사살한 것이다. 이 사건은 지난 1일 두테르테 대통령이 경찰과 군에 “코로나19 봉쇄령에 저항하는 사람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그들을 즉각 사살하라”고 명령하면서 가능했다. 당시 경찰청장은 두테르테 대통령의 발언 직후 “공공질서에 대한 진지함을 말한 것이지 실제로 발포가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정작 치안 현장은 대통령의 말을 이행한 셈이다.
필리핀 경찰은 강경한 대응을 보장한 대통령의 힘을 빌어 수많은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실제로 한 경찰이 코로나19 봉쇄령을 어긴 시민을 연행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동영상이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돌면서 치안당국을 향한 거센 비판이 일기도 했다. 해당 경찰은 전날 직위해제됐다. 하지만 필리핀 인권운동가들은 “마닐라 지역 빈민들이 정부의 부족한 지원에 항의하는 시위를 연이어 벌이자 두테르테가 사살령으로 입막음에 나서고 있다”며 “국민의 불만을 누르기 위한 경찰의 초법적ㆍ폭력적 대응을 즉각 중단하라”고 반발하고 있다.
재현된 두테르테 대통령의 공포정치에 시민사회 일각에선 하야 주장까지 나왔다. 하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날 “나에게 직접 찾아와 하야를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다”며 “그것은 그저 ‘가짜 뉴스’일 뿐”이라고 심드렁하게 대응했다. 이어 자신이 소유한 요트를 코로나19 의심환자들의 격리시설로 내놓는 방식으로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도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2016년 마약상과 중독자에 대한 즉결 처형을 허용해 수천명이 살해됐을 때도 특유의 화제 전환 화법으로 국내ㆍ외의 비난을 무시한 바 있다.
필리핀 교민사회는 불안한 치안 상황에 잔뜩 긴장하고 있다. 수도 마닐라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는 B씨는 “시민들이 거리에서 경찰에게 뺨을 맞거나 발로 걷어차이는 모습을 자주 봤다”며 “한국 교민들은 그저 최대한 집 안에 머무르며 경찰과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필리핀은 이날 현재 3,246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으며 152명이 사망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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