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코로나19’ 엑스레이에 비친 병든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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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코로나19’ 엑스레이에 비친 병든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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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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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자택 대피령이 내려진 미국 뉴욕 콜롬비아대 캠퍼스. 연합뉴스

내가 사는 위스콘신주에도 코로나19 위기로 식료품점에 가거나 가족과 산책 혹은 혼자 운동하는 걸 제외하면 집을 나가지 못하는 생활이 3주째 이어지고 있다. 아이 학교도 문을 닫은 지 오랜데, 학교가 온라인 수업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아직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다음 주에나 시작한다고 한다. 덕분에 엄마 아빠와 매일 24시간을 같이 보내며 홈스쿨링을 받는 아이가 고생이 많다. 오죽하면 학교가 그리워지기 시작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서 어린 아이가 있는 부모들에게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이란 아이와 보내는 삶이라고 할 만큼 미국 부모들의 일상에서 아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사회조사에 따르면 거의 매일 가족이 모여 저녁식사를 한다는 비율이 여전히 70%를 웃돌고,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 운동경기나 다른 이벤트를 따라다니며 주말을 보낸다. 그런데 이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생활시간 조사를 활용한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960~70년대에 비해 현대 미국 부모들이 육아에 투자하는 시간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여전히 엄마들이 육아에 보내는 시간이 더 많지만, 아빠들의 육아시간도 세 배 가까이 늘었다.

흥미로운 것은 육아시간의 증가와 함께 그 계층 간 격차도 같이 늘었다는 점인데, 고학력 고소득층 부모들의 육아시간이 훨씬 더 빠르게 증가해서 그렇다. 또 고학력층의 이혼율이 낮아 두 부모가 같이 육아를 하는 비율이 높은 것도 계층 간 격차에 기여하고 있다. 옥스퍼드 사회학자 알틴타스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계층 간 격차는 기본 육아시간보다 계발 육아시간에서 더 두드러진다. 기본 육아시간이란 쉽게 말하면 아이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먹이는 것 같은 육아 활동을, 계발 육아시간은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거나 숙제를 도와주고 아이의 여러 활동에 같이 참여하는 등 사회, 인지, 언어 능력 발달과 관련된 육아 활동을 뜻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모 학력에 따른 계발 육아시간 차이가 거의 없었는데, 2010년경에 이르면 대학을 나온 부모들이 그렇지 않은 부모들에 비해 50% 이상 많은 시간을 계발 육아 활동에 쓰고 있다.

이런 격차는 코로나19로 육아와 교육이 전적으로 부모들에게 맡겨진 지금 훨씬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고학력 고소득층 부모들은 넓은 정원이 있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수학문제를 풀고 같이 읽을 책을 고르고 화상통화를 이용해 음악 레슨을 계속하는 등 많은 시간을 계발 육아에 투자할 수 있다. 반면 도심의 저소득층 부모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을 무릅쓰고 계속 일을 나가거나 아니면 실업으로 인한 생계 곤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하면서 좁은 아파트에 갇혀 지내는 아이들의 교육까지 책임져야 하는 형편이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이미 학교에 가지 않는 여름방학에 계층 간 학업 격차가 학기 중에 비해 훨씬 커진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와 있다. 9월 가을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거의 반년에 가까운 방학 아닌 방학을 맞은 미국 아이들의 계층 간 학업 격차가 얼마나 커질지, 그리고 그 커진 격차가 아이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 위기가 각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건강 상태를 엑스레이를 통해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을 하는데, 엑스레이에 비치는 미국 사회는 여러 가지 병이 깊은 거인의 모습이다. 극심한 이념적 양극화로 인한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 레이건 행정부 이후 지속되어 온 예산삭감과 뿌리 깊은 연방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허약해진 행정 시스템,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급 간 양극화된 삶 등, 코로나19 위기는 미국 사회의 그늘진 구석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에도 아픈 미국 사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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