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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21대 총선, 진짜 ‘왼쪽 날개’가 필요하다

입력
2020.04.04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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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1988년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주자 제시 잭슨의 말로 국내에는 같은 해 고 리영희 교수의 칼럼을 통해 소개되었다. 민주화가 시작되었지만 냉전 반공주의가 아직 위력을 발휘하던 시절, ‘좌’는 무조건 나쁘며 ‘우’는 절대로 옳다고 강요하는 왜곡된 이념 지형을 꼬집는 데 더없이 적절한 은유였다. 이후 이 구절은 이념 편향이 문제될 때마다 심심치 않게 사용되어 왔다. 심지어 철 지난 색깔론을 펼치던 보수정당이 지자체 선거에서 패하자 좌우 날개가 필요함을 주장하는 ‘웃픈’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잭슨의 발언이 제기된 맥락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자본주의 체제가 소외, 차별과 불평등을 야기하는 한 정치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추구하는 진보 정치는 어디서나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승자독식의 선거제도에서 미국의 진보 세력은 힘 있는 독자 정당을 구축하지 못했고 중도 자유주의 민주당의 ‘왼쪽 날개’로 참여하거나 사회운동을 전개하며 민주당 비판과 선별적 지지를 오가는 어정쩡한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압박은 루스벨트와 존슨 민주당 정부의 ‘뉴딜’과 ‘위대한 사회’ 같은 개혁 추진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것이 결과한 미국식 복지국가는 독자 진보정당의 부재를 체감케 하는 취약한 것이었다.

게다가 민주당은 1976년 지미 카터의 대통령 당선 후 ‘뉴딜’과 ‘위대한 사회’로부터도 멀어져 갔다. 1980년과 1984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강경 보수파 로널드 레이건에 참패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훗날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이 참여한 ‘민주당지도자회의’는 민주당이 사회운동과 거리를 두고 친기업ㆍ친시장 정당이 되어야 함을 강력히 주장했다. 레이건은 허약한 복지마저 축소시켰지만 민주당은 힘껏 저항하지 않았고 때로 그에 협조했다. 흑인민권운동가 잭슨이 1984년에 이어 1988년에도 대선 경선에 나선 것은 이 같은 우경화 흐름에 도전하기 위함이었다.

잭슨은 레이거노믹스로 고통받고 있는 유색인종ㆍ여성ㆍ성소수자ㆍ노동자ㆍ농민ㆍ빈민의 ‘무지개연합’을 주창하고, 전국민건강보험, 노동권 강화, 인종ㆍ성 평등, 누진과세 강화를 통한 공정분배, 뉴딜식 공공투자, 무상 고등교육 확대, 국방예산 감축 등 진보적 의제들을 설파해 나갔다. 그의 캠페인은 당내뿐 아니라 외부의 진보 세력까지 끌어들였고, 풀뿌리 지지에 기초해 경선 중반 선두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보적 개혁에 부정적인 당 주류의 단합으로 결국 경쟁주자 마이클 듀카키스에 크게 패하고 만다.

당 주류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잭슨은 ‘무지개연합’의 성과가 대선 플랫폼에 반영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듀카키스는 잭슨이 아닌 당내 보수파 로이드 벤슨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진보적 의제들도 일절 수용하지 않았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발언은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경선 패배를 인정하고 듀카키스를 지원하겠다는 제스처를 보인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보파가 배제되고 ‘오른쪽 날개’만 있는 민주당의 암울한 실태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1988년 잭슨이 처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툭하면 촛불혁명을 거론하는 한 거대 정당은 우경화로 치달았지만 잭슨의 목소리라도 들렸던 1980년대 미국 민주당보다도 더 오른쪽에 있는 것 같다. 그나마 우리가 나은 점은 ‘왼쪽 날개’가 독립적으로 자랄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지만, 꼼수 비례정당들의 출현은 그마저 짓밟아 뭉개 버리고 있다. 한국 사회는 거대한 두 ‘오른쪽 날개’를 지닌 괴물새의 모습에 만족하고 추락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진짜 ‘왼쪽 날개’를 자라게 해 추락만은 면할 것인가. 진보 정치를 바라는 이라면 이번 총선에서 답해야 할 질문이다.

김상현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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