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는 인도, 필리핀, 태국 등 주변 국가와 달리 공식적으로 도시 봉쇄를 하고 있지 않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치명률이 10%에 육박할 정도로 사망자가 동남아에서 가장 많고, 봉쇄 여론이 거센데도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은 봉쇄 불가를 고수하고 있다.
조코위 대통령은 최근 “202개국 코로나19 정책의 장단점을 살펴본 결과, 지리ㆍ문화ㆍ사회적 여건과 재정능력 면에서 우리나라 조건에 맞는 정책을 구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고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카르타 봉쇄 이후 역효과를 우려하고 있다. 봉쇄 여부는 조코위 대통령 말처럼 여러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
자카르타는 인구 1,200만명에, 우리나라 수도권처럼 인근 도시를 아울러 일컫는 ‘자보데타벡(jabodetabek)’ 인구까지 합치면 약 3,167만명이 동일 생활권을 이룬다. 인근 도시에서 자카르타로 출퇴근하는 유동 인구만 1,000만명에 이른다. 자카르타에서 소비되는 농산품과 생필품 역시 주로 자카르타를 둘러싼 인근 도시에서 들여온다. 자카르타를 봉쇄하면 사람의 이동뿐 아니라 물류의 이동마저 막히는 구조다. 인근 도시 주민들은 일을 잃어 생계가 위협받고, 자카르타 시민들은 물류의 이동만큼은 허가된다 하더라도 최악의 경우 생필품 부족과 가격 인상에 시달릴 수 있는 셈이다.
도시 빈민 문제도 봉쇄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세계은행이 지난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카르타 267개 지구 중 절반 가까운 118곳에 빈민가가 존재한다. 이들은 오젝(오토바이택시) 기사 등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처지다. 집에 주방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 노점에서 800원 정도에 한끼를 해결한다. 도시 봉쇄는 이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직격탄이다.
도시 봉쇄로 인한 경제활동 마비는 오히려 자카르타 빈민들의 귀향 엑소더스를 부추길 가능성도 있다. 도시에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빈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지역사회 감염 우려도 커진다. 현재 공식 집계상 인도네시아 전체 코로나19 환자 발생 및 사망의 약 절반이 자카르타에서 발생했다. 현재 지방에서 발생한 코로나19 환자 중 자카르타에서 감염된 것으로 보이는 사례도 많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택한 봉쇄 카드가 오히려 전국적인 감염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경제 지표 역시 봉쇄를 단행할 분위기가 아니다. 조코위 대통령조차 ‘경제가 봉쇄보다 우선’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한국투자증권 현지법인에 따르면 1일 기준 연초 대비 인도네시아 종합주가지수는 28.3% 하락했고, 달러 대비 환율은 18.6% 상승했다. 최근 환율이 1998년 외환위기 수준으로 치솟자 경제 부처들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현지 진출 국내 증권업체 관계자는 “봉쇄 조치는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어 선택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폭동 사태가 가장 우려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수하르토의 32년 군부 독재를 무너뜨린 1998년 ‘자카르타 폭동’은 외환위기에 따른 환율 및 유가 급등, 대량 실업 등 경제적 요인에 의해 촉발됐다. 자카르타에서만 1,000명 이상의 화교가 목숨을 잃었고, 한국인들은 자신이 절대 화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한인들 역시 1998년 자카르타 폭동에 버금가는 돌발 상황과 유혈 사태를 가장 걱정하고 있다. 대규모 군중이 운집하는 폭동은 사회 혼란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코로나19 감염 확산의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제 국가 봉쇄령이 떨어진 인도는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도시 빈민들의 엑소더스가 벌어지면서 대규모 아사, 사회적 혼란 등에 직면해 있다. 수도 마닐라를 포함해 루손섬 전체를 봉쇄한 필리핀에선 빈민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인도 등의 사례를 언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코위 대통령은 국민보건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저소득층 지원대책 등을 발표했다. 전격 봉쇄 대신 재택근무, 유흥업소 영업 중단, 사회적 거리 두기, 외국인 입국 금지 등 제한 조치의 강도를 서서히 높이고 있는 것이다. 자체 봉쇄에 들어간 지방 정부에도 중앙 정부의 지시를 따를 것을 재차 권고했다. 지방자치를 존중하는 인도네시아 전통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현지 여론은 봉쇄 찬성이 우세한 가운데 반대 의견도 눈에 띈다. 건설회사 직원 니켄(25)씨는 “가난한 사람들이 봉쇄 후에 더 불행해질 것”, 약사 이스마(24)씨는 “정부가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봉쇄 반대 이유를 한국일보에 알렸다. 회사원 치트라(24)씨는 “조코위 대통령이 한국의 코로나19 정책을 참고한 것 같다”고 했다.
안선근 국립이슬람대 교수는 “인도네시아 국민성을 감안하면 강압적인 봉쇄 조치는 오히려 폭동 등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면서 “반면 정부가 단계적으로 대응하면서 설득하면 잘 따르는 게 또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특징이라 조코위 대통령이 판단을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재한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은 “사회 혼란이 코로나19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어서 봉쇄만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라며 “각 지방 정부가 나름대로 예방과 안전 정책을 수립해 잘 헤쳐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매일 추가되는 코로나19 관련 숫자에 연연하지 말라는 조언도 있다. 자카르타에 거주하는 한 한인 의사는 “(인도네시아엔) 아직 진단을 받지 못한 감염자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현재의 사망자 숫자나 치명률을 부각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미 귀국했거나 아직 남아 있는 한인 중에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자카르타 한인들이 자체 예방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선에서 야외 활동을 해도 된다”고 덧붙였다. 전날 기준 인도네시아 코로나19 환자는 1,790명, 사망자는 170명으로 치명률은 9.5%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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