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연구소의 ‘2019 세계번영지수’는 한국 사회를 ‘저신뢰사회’로 진단했다. 우리나라는 종합평가에선 세계 167개국 중 28번째로 살기 좋은 나라지만 구성원 간 상호신뢰나 협조, 네트워크 등을 의미하는 ‘사회적 자본 부문’에선 145위로 낙제점을 받았다. 일찍이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한국을 ‘저신뢰국가’로 명명한 바 있다.

사회의 신뢰 수준은 재난 상황에서 가감 없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한국리서치 여론속의여론팀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서 ‘신뢰’에 주목한 이유다. 우리 사회는 이번 재난을 겪으면서 얼마나 성숙한 역량과 상호 신뢰를 보여줬을까. 조사는 대구ㆍ경북 지역 확산세가 주춤하기 시작한 3월13일부터 16일 사이 전국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그림1] 코로나19를 겪으며 우리 사회에 대한 신뢰도

“우리 사회 신뢰했다” 61%

먼저 코로나19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가 신뢰할 만하다고 느꼈는지 물었다. 응답자의 61%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림 1)

실제로 전 세계적인 사재기 광풍 속에서도 한국은 차분함을 유지했다. 마스크를 사기 위한 긴 시간의 기다림에도 큰 불평 없이 질서 정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엄습하는 공포 속에서 확진자나 중국, 신천지 등을 향한 혐오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우한 교민을 따듯하게 맞고 대구ㆍ경북 지역의 어려움에 동참하는 등 서로를 품으며 점차 안정을 찾았다.

[그림2] 개인의 사회적 실천

위기 속 자기의무 실천

신종 코로나 위기가 한국을 신뢰 국가로 도약하게 한 계기가 된 걸까. 이번 조사에서 몇 가지 단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사회적 거리두기 등 정부 권고에 따른 자기 의무 실천이 강했다. 우리 국민의 89%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모임자제’를 몸소 실천했다. 76%는 5부제까지 등장한 상황 속에서도 ‘필요한 만큼만 마스크를 구매’했다. 강력한 정부의 제재와 권고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신뢰가 없었다면 권고는 무색해졌을 것이다. (그림 2)

[그림3] 각 사회주체들의 노력

두 번째 단서는 공적 방역시스템에 대한 전폭적 신뢰다.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해 각 사회 주체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물은 결과, 국민 대부분이 의료계와 정부 등 공적 영역의 방역당국이 ‘노력했다’는 데에 동의를 보냈다. (그림 3)

이는 이전의 여러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국정지지도가 폭락하고 연일 정부 책임론이 들끓었던 예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자기 의무에 대한 신뢰를 반영하듯 ‘국민’이 노력했다는 데에도 93%가 동의했다.

다만 언론과 종교계, 정치권의 노력에 대해선 평가의 온도 차가 뚜렷했다. 특히 정치권이 코로나 극복을 위해 노력했다고 보는 비율은 34%에 불과했다. 저신뢰국가를 대표하는 권력기관에 대한 불신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광역자치단체에 대한 평가를 거주지 별로 살펴보면 광주ㆍ전라 지역민(92%)은 높았지만, 부산ㆍ울산ㆍ경남(81%)은 다소 낮았다. 대구ㆍ경북 지역은 84%였다.

[그림4] 민간의 참여

‘민간’보다는 ‘정부’가 책임져야

정부가 영업 및 활동 자제를 권고하자 민간 기관은 이에 적극 동참했다. 학원의 휴원, 공연이나 경기의 취소, 대면 종교집회 중단 등을 경험한 비율이 80~90%에 달했다. 경제 활동을 하는 응답자들의 직장에서 재택ㆍ유연 근무를 실시한 비율도 절반 수준으로 조사됐다. (그림 4)

[그림5] 정부가 강제해야 할 민간활동

이런 민간의 광범위한 동참에도 정부의 강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정부의 제재 권고가 있었던 집회ㆍ시위의 제한(89%), 종교 집회의 제한(86%), 공연ㆍ경기의 제한(73%), 학원의 휴원(69%) 등은 모두 ‘민간의 자율적 판단’에 맡기기보다 ‘정부의 강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동의된 사회적 규범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선 정부가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그림 5)

[그림6] 사회적 비용의 정부 지원 필요성

코로나19로 발생한 각종 사회적 비용에 대해선 정부가 감당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확진자 의료비, 확진자 및 자가격리자 생계비, 폐쇄조치 사업장의 영업손실 등 직접적 비용에 대해서는 일정부문 이상 지원해야 한다는 응답이 90%를 넘었다. 또 응답자의 70%는 민간 기업들, 특히 타격이 컸던 문화체육계와 관광업계 등 특정 부문의 경영상 손실에 대해서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봤다. (그림 6)

일용직과 자영업에 대한 지원 동의도가 더욱 높긴 했지만, 대기업의 경영 손실을 보전해줘야 한다는 응답도 73%에 달한 점도 주목된다. 학원 손실 부분에 대해서도 유사한 견해였다.

다만 사회의 주된 경제활동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종교기관의 손실 보전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집단 감염 및 물의를 일으킨 일부 종교계에 대한 질타가 섞인 여론이다.

[그림7] 사회적 관계

“도움 받을 사람도 기관도 없다”

이처럼 정부의 역할이 커야 한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사회적 관계와 관련한 다소 우울한 결과에서 단초가 보인다. 국민의 절반은 코로나 상황에서 집안일(54%), 경제적 부탁(53%) 등을 할 사람이 없다고 응답했다. (그림 7)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공적 기관에 대한 기대는 더욱 열악했다. 70%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집안일과 경제적 도움에 대한 손을 내밀어 볼 수 있는 기관이 없다고 응답했다. 문제가 닥쳤을 때 모든 걸 혼자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불안이 크다는 얘기다.

[그림8] 보육공백 도움
[그림9] 도움 받은 곳

“낙심하거나 우울해 이야기 상대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응답은 68%로, 직접적 도움의 경우보다 다소 높았다. 그러나 이는 지난해 전국 사회조사의 동일 문항(84%) 대비 급격히 떨어진 수치다. 개학 연기로 보육공백 상황에 처한 이들의 절반은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나마 도움을 가장 많이 준 건 가족들이었다. (그림 8,9)

이번 조사로 확인된 책임 있는 시민들의 행동과 방역 당국의 대처에 대한 평가는 ‘저신뢰국가’라는 오명을 걷어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가야 할 길도 분명히 드러났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자기 의무적 성격의 국민적 실천은 훌륭했다. 그러나 지인에 대한 물질적ㆍ비물질적 지원, 기부 및 봉사활동 등 보다 적극적인 협력 활동을 하는 경우는 20%도 안 됐다. ‘각자도생’ 현실에 놓인 국민 절반을 구제할 수 있는 공적 시스템이 절실하고, 구성원 간 협력도 더 필요하다.

김혜진 한국리서치 여론본부 부장 신하은 연구원

(그래픽: 한국리서치 3월 13일~16일 전국 1,000명 대상 조사ㆍ김문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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