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白衣從軍)은 조선시대 형벌 중 하나였다. 흰옷은 관직이 없는 상태의 신분을 가리킨다. 계급장을 떼였지만, 종군의 의무는 짊어져야 하는 징계였던 거다. 참전해 공을 세우면 복직할 수 있다는 기회의 의미도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생전 두 번이나 백의종군의 수모를 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첫 번째는 마흔두 살 때인 1587년(선조 20년) 녹둔도 전투 직후, 두 번째는 그 10년 뒤 전술적 판단을 근거로 선조의 부산포 진격 지시를 거부해서였다.
□ 유승민 의원이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9일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지 50일 만이다. 당시 그는 새로운보수당과 자유한국당의 신설 합당과 보수를 개혁할 공정한 공천을 요구했다. 불출마는 배수진이었다. 그러나 이뤄진 건 없었다. 흡수 통합 모양새로 마무리됐고, 초유의 ‘호떡 (뒤집듯 뒤집은) 공천’으로 얼룩졌다. 일각의 예상과 달리 황교안 대표는 유 의원에게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삼고초려에도 하지 않았다. 불출마 선언문의 마지막이 “어디에 있든 보수재건의 소명을 다하겠다”는 것이었으니 그의 백의종군은 예상됐던 일이긴 하다.
□ 우선 자신과 가까운 지상욱ㆍ김웅 후보부터 찾았지만, 보폭을 넓힐 듯하다. 공개 행보가 알려진 이후, 하루 만에 서울ㆍ경기ㆍ인천ㆍ대전 30여곳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특히 중도 표심의 향배가 승패를 가르는 수도권 후보들이 SOS를 치고 있다. 그는 “계파를 따지지 않고 돕겠다”고 했다. 유 의원이 활발하게 움직일수록 마음이 급해지는 건 황 대표일 거다. 다른 후보들의 지원 유세까지 다닐 만큼 여건이 녹록지 않다. 총선 이후를 생각하면, 일단 종로 전투에서 무조건 승리를 거둬야 한다.
□ 유 의원의 백의종군은 처벌이 아닌 선택이다. 그렇다고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건 아니다. 당직 없이 지원하고 있지만, 이미 그도 참전했기 때문이다. 그 결말은 그가 도운 후보들의 성적표에 달렸다. 미래통합당이 수도권에서 선전하면, ‘TK(대구ㆍ경북)의 적자’ 이미지를 벗고 전국 정치인의 가능성도 열릴 것이다. 그 반대라 해도, ‘패장’은 황 대표가 될 테니 크게 잃을 건 없다고 계산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선주자 유승민’도 과거형이 될 테다. 사즉생의 각오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안온한 백의종군 역시 그래서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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