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유럽 남동부와 중동에서 널리 쓰인 환각제를 먹고 꿈을 꾸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지구의 정복자’(사이언스북스)에다 써둔, 요한계시록 평가다. 요한계시록을 “고대 원시인의 흑주술”로 여기는 윌슨은 요한의 “정신분열증”도 의심한다. 요한계시록의 요한이 사도 요한이냐 아니냐 논란이 있다지만, 그 누구건 요한계시록은 환각 혹은 착란의 기록이라는 주장이다.
현실 세계 수많은 사람이 떠받드는 걸 이리 냉소하는 건 최소한 현명한 태도는 아니다. 하지만 윌슨에게도 이해할 구석은 있다. 요한계시록식 종말이 진짜라 믿는 이들이 무려 60%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가 종종 나오는 곳이 미국이니까. 과학으로 세계 최강대국이 된 미국이 대체 왜 이 모양일까, 억장이 무너질 법도 하다. 참고로 윌슨은 남부 앨라배마의 남침례교 집안, 그러니까 보수 개신교 집안 출신이다.
신천지로 유명해진 요한계시록의 ‘12지파’ ‘14만4,000명’은 그 시절 ‘많고도 온전한 수’라던 ‘12’와 ‘10’을 변용한 것이다. 12지파 14만4,000명, 그 숫자 자체엔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의 제자, 12사도도 그렇다. 제자가 11명도, 13명도 아닌 하필이면 똑 떨어지는 12명이었단 얘기가 아니다. 괜찮은 제자가 수십 명이었는데 눈물을 머금고 12명에서 끊었을까, 아니면 몇 되지 않은 제자를 12에 맞추려 부풀렸을까. 일종의 ‘잘생김 몰아주기’겠지만, 성경 속 예수는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한 사람 같던데 말이다.
바코드라더라, 생체 칩이라더라, 말 많던 ‘짐승의 숫자 666’도 그렇다. “로마의 황제 네로를 암호로 표시한 것이다. 그리스어 ‘네론 카이제르’를 히브리어로 음역한 뒤 히브리어 자음이 나타내는 숫자를 합하면 666이 된다.” 미국 종교학자 크리스틴 스웬슨이 ‘가장 오래된 교양’(사월의책)에 써둔 말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해석이다.
신천지 현상에서 ‘한국 젊은이들의 상심’을 읽어내는 것도 좀 식상하다. ‘666=네로 황제’를 논증한 인물 중엔 칼 마르크스의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있다. 엥겔스라면 “원시인의 흑주술”에 빠진 젊은 프롤레타리아트 뒷통수를 딱 치며 ‘닥혁(닥치고 혁명)!’ 외치지 않았을까.
신약 자체가 종말론이다. 신약의 뼈대라는 바울의 서신은 한갓진 안부편지가 아니다. ‘심판의 날이 오늘 내일 하는데, 너네 진짜 이러고 살 거야?’라는 절규다. 신약이 이러니 그 마지막은 기원후 1세기 네로 즈음의 로마가 망하리라던 요한계시록 차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약 전체 어조에 비해 좀 튄다는 평이 많지만.
결론적으로 요한계시록은 2,000년 전인 기원후 1세기, 이미 실패한 예언이다. 로마는 안 망했고 심지어 기독교를 공인했다. 회개한 로마는 천년왕국이 됐어야 하는데, 되레 기독교 공인 뒤 망했다.
요한계시록이 마냥 나쁜 건 아니다. 로마, 혹은 로마로 상징되는 폭압적 권력에 맞선 이들에게 끝까지 버틸 용기를 줬다. 박정희 독재 시절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라던 노래 ‘상록수’ 같다 할까. 요한계시록보다 상록수 가사가 훨씬 세련됐다 싶지만, 환각 혹은 착란이라던 윌슨의 “생물학적 결론”을 들이대진 말자. 그저 ‘2,000년전 고대인의 감수성’ 정도로 빙긋 웃어주자.
코로나19 사태는, 신천지처럼 성경을 한 줄 한 줄 있는 그대로 읽어대는 건 사이비일 뿐이란 오래된 얘기를, 드디어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니 친북 친중 빨갱이정권 생명책 운운하고, 대형교회 세습을 정당화하며, 동성애는 죄악이라는 등 성경에서 세속의 온갖 혐오를 정당화하는 글귀를 척척 잘 뽑아내는 목사님들에게 우리는 마침내 방호복 같은 한마디를 던질 수 있게 됐다.
“혹시, 사이비세요?”
조태성 문화부장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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