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영농조합 인수해 “주식회사 전환” 투자자 모아
각종 혜택 특별법·등기제도 허점 악용 피해자 속출
조합 47%만 실제 운영… 정부, 휴·폐업 조합관리 뒷짐
농어업 공동경영조직 육성과 농어촌사회 안정을 돕는다는 취지로 정부가 각종 세제혜택을 주고 정책자금까지 지원하는 영농(營農)조합과 영어(營漁)조합이 사기꾼들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사기꾼들은 부실 운영되다가 사실상 휴ㆍ폐업된 영농조합과 영어조합을 브로커를 통해 헐값에 사들인 뒤 농지나 어업권을 취득해 범죄에 활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우량 주식회사로 둔갑시켜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고 있다. 이처럼 범죄에 악용되는 부실 영농조합과 영어조합이 전국에 산재해 있어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별다른 대책 없이 수수방관하고 있다.
◇부실 영농조합 인수해 투자금 가로채
서울북부지검 조세범죄형사부(부장 한태화)는 최근 자본 잠식된 부실 영어조합을 인수한 뒤 자본금 200억원의 우량 주식회사로 꾸며 사기범죄에 이용한 김모(51)씨 등 5명을 적발해 재판에 넘겼다. 김씨 등은 영어조합에 대한 정부의 허술한 관리감독과 법원 등기제도의 허점을 악용해 허위 재무제표를 등기한 뒤 다단계 판매 방식으로 자금을 끌어 모아 3,600여명에게 155억원 상당을 편취했다.
검찰과 피해자들의 말을 합하면 영농조합을 매개로 한 이들의 사기행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김씨는 지난해 영어조합과 영농조합 한 곳씩을 인수해 이름을 바꾸거나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하면서 자본금을 과대 등기하는 수법으로 이미 피해자들로부터 550억원을 가로챈 상태였다.
사기꾼들이 이처럼 영농조합이나 영어조합을 범죄에 활용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일보 취재결과 이들은 주로 영농조합을 농업회사법인이나 일반주식회사로 전환한다고 홍보한 뒤 투자자들로부터 원금보장과 상장회수 인수를 미끼로 돈을 끌어 모았다. 처음부터 주식회사를 설립해 등기하려면 자본금납입증명서 등을 제출해야 하지만, 영농조합을 주식회사 형태로 바꾸기 위한 등기에는 이 같은 서류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형식적 심사가 이뤄지는 등기제도의 허점을 노려 사기꾼들은 전국에 방치된 부실 영농조합을 헐값에 사들인 뒤 자본금을 부풀려 우량 주식회사로 둔갑시키고 다단계 방식으로 거액의 투자금을 가로챘다.
법원행정처 사법등기국에 따르면 일반 법인을 주식회사 형태로 변경할 때는 자본금납입증명서와 같은 법인재산 관련 증빙서류를 제출해 법원 인가를 받아야지 등기를 마칠 수 있지만, 영농조합은 예외다. 영농조합을 농업회사법인이나 일반주식회사로 전환할 때는 ‘농어업경영체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농어업경영체 지원법)’이라는 특별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조직변경에 관한 별도의 서류를 제출할 필요가 없다.
김씨 같은 사기꾼들도 이 같은 특례법을 악용해 자본잠식 상태의 영어조합 법인을 자본금 200억원의 주식회사로, 부실 영농조합을 자본금 127억원의 농업회사법인으로 허위 등기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우량주식회사 전환을 미끼로 ‘주식을 구입하면 원금을 보장하고 상장사 인수합병으로 주가를 상승시켜 고수익을 지급하겠다’고 피해자들을 속였다. 김씨 일당이 이 같은 방식으로 피해자들에게 거둬들인 뒤 숨겨둔 금품은 금괴 56억원, 차명예금 45억원, 차명부동산 18억원, 현금 18억원 등 137억원에 달했다.
◇양도세ㆍ취득세 감면 등 각종 혜택도
사기꾼들이 영농조합이나 영어조합을 범죄에 활용하는 이유는 또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영농조합은 농지 취득권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설립하고 출자할 때 양도소득세와 등록면허세 등을 면제받는다. 운영시에는 법인세 면제ㆍ감면, 취득세 감면, 부동산 재산세 50% 감면, 부가세 면제 등의 혜택도 누린다. 조합원 개인도 양도소득세ㆍ소득세 면제 혜택을 받고, 농업기계나 비료를 구입할 경우 각종 지원금까지 받는다.
영농조합이 주식회사로 전환될 때 조합원의 자격요건이 완화되는 점도 사기범죄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영농조합은 농업인 5명 이상이 조합원으로 참여해 농지 등의 현물출자로 설립할 수 있다. 비농업인은 의결권 없는 준조합원 자격을 갖고, 조합원은 1인 1표 원칙에 의해 의결권을 가진다. 그러나 영농조합과 유사하지만 주식회사 형태인 농업회사법인은 농업인 1명만 발기인으로 참여해도 설립할 수 있으며, 비농업인도 90% 이내에서 출자한 뒤 출자지분에 비례해 1주 1표를 행사한다. 때문에 부실 영농조합을 브로커를 통해 헐값에 사들인 뒤 농업인 1명을 끼고 농업회사법인으로 전환하거나, 한 단계 더 나아가 일반주식회사로 전환하면 사람들을 속이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영농조합은 그 동안 편법 재산증식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의심도 받았다. 검찰의 세월호 참사 수사 당시에도 구원파 인사들이 참여한 영농조합의 농지들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차명재산이란 이야기가 있었다. 정부는 의혹이 불거지자 해당 영농조합과 구원파 인사들을 상대로 46억원의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소해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등록 영농조합 중 절반만 운영
정부 조사에서도 영농조합과 영어조합이 설립취지와 다르게 부실 운영되는 사례가 부지기수로 나타난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이양수 미래통합당 의원이 농림부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6년 농림부가 실시한 전국 영농조합 실태조사 결과, 등록된 전체 영농조합(3만7,453곳) 가운데 실제 운영중인 곳은 47%(1만7,416곳)에 불과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등록은 됐지만 운영준비ㆍ임시휴업ㆍ휴업ㆍ폐업 등으로 운영되지 않는 곳이 38%(1만4,213곳)에 달했고, 15%(5,770곳)는 아예 소재불명 상태였다.
농림부는 실태조사 이후 “비정상적 농업인에 대해 대대적인 정비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조합원 및 출자비율 요건을 위반하면 시정명령, 목적 외 사업을 하게 되면 해산명령 청구 요청, 실태조사에 불응하면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하지만 김씨 사기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실태조사 이후에도 부실 영농조합이 범죄에 악용되는 일이 잇따랐다. 특히 영농조합을 우량 주식회사로 세탁하는 과정에 사실상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기꾼들의 추가범죄가 꼬리를 물었다. 검찰은 부실 영농조합이 부동산 투기의 재료로 이용되거나 세제혜택 및 보조금 수수 등의 목적으로 악용되는 경우도 많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영농조합이 마을 주민들의 공동운영 형태로 출범했다가 조합원간 갈등으로 사실상 휴ㆍ폐업되면 특히 사기꾼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 철저한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어조합도 사기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일보가 해양수산부로부터 입수한 2018년 실태조사 결과 실제 운영중인 곳은 등록된 전체 영어조합의 절반 정도에 그쳤다.
◇사기범죄 앞에서 법원 등기는 무용지물
전국의 크고 작은 영농조합들이 사기범죄에 이용되는 이면에는 정부의 관리감독이 허술한 영향이 크지만, 법원 등기가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점도 한몫하고 있다. 영농조합의 출자금이 과대 신고되거나, 영농조합이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 등기를 해도 회사의 기본적인 재무상태조차 검증하지 않고 증명서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원행정처 사법등기국은 이에 대해 ‘형식적 심사권’을 강조하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심사권이란 허위로 등기가 이뤄지는 것을 막고 실체관계에 부합하는 등기가 이뤄지도록 적법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등기심사는 수사기관이나 재판부가 갖는 ‘실체적 심사권’이 아니라 신청정보, 첨부정보 및 등기기록에 나타난 사실관계를 기초로만 판단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다는 것이다. 다른 서면을 별도로 제출하도록 요구하거나 사실관계 전부를 조사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특례법(농어업경영체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적용을 받는 영농조합의 경우 최초 설립 때나 주식회사로 전환될 때 등기 직원이 법인의 재무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본금납입증명서 제출을 요구할 수 없다. 사기꾼이 마음만 먹으면 부실회사를 우량회사처럼 보이도록 과대ㆍ허위 등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등기제도는 신설하거나 전환하는 법인의 정보를 빨리 등록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실체적 판단까지 하게 되면 등기제도의 취지에도 맞지 않고 접수도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기꾼들은 등기 제도의 이런 허점을 노리고 영농조합을 범죄의 먹잇감으로 악용하고 있다. 지난 3월 한국일보 기자와 만난 A씨도 답답함을 호소했다. A씨는 서울시 외곽에 위치한 자신의 농지에 대규모 체험학습장을 만들려고 계획했다가 영농조합을 만들면 각종 세제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브로커 말에 속아서 주변 농업인과 함께 수천만 원의 수수료를 내고 영농조합 두 곳을 설립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 보니 브로커가 대리한 등기상의 현물출자 금액은 실제보다 3배나 부풀려진 280억원과 310억원으로 허위 등기돼 있었다.
그러나 일부 토지는 애초 농지거래 허가를 받을 수 없는 곳이라 영농조합 설립으로 얻을 혜택이 전혀 없었다. 결국 이들 토지까지 브로커가 등기에 포함시키는 바람에 거액의 양도소득세만 물고 조합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A씨는 “브로커 말을 믿고 조합 설립에 참여했다가 양도세만 수억 원을 물게 된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며 “영농조합이 농업인을 위한다는 취지로 우후죽순 설립되고 있지만, 정부 관리가 제대로 안되면서 선량한 농민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농림부ㆍ해수부 예방대책 검토
영농조합과 영어조합을 활용한 사기사건이 잇따르자 정부는 예방 대책을 고민 중이다. 농림부는 영농조합이 법원에 등기할 때 농지 등 현물출자 규모를 과장해서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해도 적발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드러나자, 영농조합의 경우 등기에 앞서 사실관계를 검증한 증명서를 법원에 제출토록 하거나, 등기 직후 사실관계를 심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농림부 관계자는 “영농조합에서 주식회사로의 전환을 엄격하게 통제하려면 농어업경영체 지원법과 시행령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양수산부도 영어조합 실태조사 결과 부실 운영되는 것으로 밝혀진 조합에 대해선 직권으로 설립을 취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해수부 관계자는 “영어조합의 설립ㆍ운영 내용이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으면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해 정리할 수 있다”며 “등록내용이 사실과 다르면, 정책자금 지원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과태료 부과보다는 지원대상에서 아예 배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올해 2월 개정된 농어업경영체 지원법은 영농조합이나 영어조합의 실태조사 결과 실제 등록정보와 일치하지 않으면 농림부ㆍ해수부 장관이 등록정보를 정정하거나 말소할 수 있도록 했다.
김청환 기자 chk@hankookilbo.com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김영훈 기자 hu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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