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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흑사병의 도시, 시에나가 부르는 희망의 노래

입력
2020.03.27 04:30
수정
2020.03.27 15:0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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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시에나 ©게티이미지뱅크
이탈리아 시에나 ©게티이미지뱅크

어두운 밤, 아무도 다니지 않는 텅 빈 골목에 노래 소리가 들린다. 어느 집 창가에서 부르기 시작한 노래였다. 이웃한 집의 발코니에서 또 다른 남자가 화음을 넣어 함께 부른다. 하나둘 이웃들이 따라 부르는 노래는 거리의 작은 합창이 되었다. 인적이 끊긴 길에서 갑자기 들려 온 소리에 화들짝 잠이 깬 개도 따라서 컹컹 짖는다.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던 마을에 아직 사람이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코로나19 사태로 이동이 금지되고 각자의 집에 갇혀 있는 이탈리아인들은 발코니와 창가로 나가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SNS를 통해 세계 곳곳에 물결처럼 퍼져간 영상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회자된 이 영상은 이탈리아 시에나 사람들이 “우리의 시에나여 영원하라 Viva la nostra Siena”라며 다 같이 부른 전통노래였다.

노래가 울려 퍼진 좁다란 골목은 토스카나에서도 가장 근사한 중세 도시로 손꼽히는 시에나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구시가로 들어서면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중세 건축물들이 골목 좌우로 길게 늘어서고, 오래된 건물 아래로 뚫린 아치 통로를 지나면 또 다른 골목이 나타난다. 언덕 지형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좁은 계단 길에도, 광장을 빙 둘러싸고 활처럼 이어지는 중심 거리에도, 어깨를 서로 맞댄 중세시대 집들이 벽처럼 이어진다. 그 집집마다 사용한 특유의 벽돌 색깔은 빨간색도 아니고 갈색도 아닌 ‘시에나 색’이라는 고유의 이름이 있을 만큼 유명하다. 도시를 대표하는 색깔 이름까지 따로 가진 ‘색으로 기억되는 도시’인 셈이다.

여행자가 좋아하는 중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의 풍경이란, 숨겨진 아픔일 때가 많다. 전쟁에서 지든 전염병이 만연하든 무역로가 변하든, 어떤 갑작스러운 몰락이 오고 나면 도시의 모습은 더는 변화나 발전을 못하고 냉동 보존되듯이 멈춰 선다. 그 도시가 한창이던 시절에는 당대에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인’ 풍경을 만들었던 것인데 말이다.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나고 나면 현대의 사람들이 옛날 옛적 모습을 구경하겠다고 몰려드니, 조금은 여행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시에나 역시 흑사병으로 죽어 간 도시였다. 1348년 흑사병이 돌면서 당시의 인구 2만5,000명이 1만6,000명으로 줄었으니 시민 셋 중 하나는 잃은 셈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칭송이 자자한 시에나 대성당 역시 흑사병의 여파로 미완성된, 그래서 더 유명해진 건축물이다. 처음 개축 공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피렌체 공화국을 이기기 위해 세계 최대 규모의 성당을 목표로 했지만, 흑사병이 도시를 휩쓸면서 더 이상 공사는 진행될 수 없었다. 피렌체 대성당보다 더 크고 화려한 성당을 짓겠다는 야망은 지금도 대성당 옆에 짓다 만 벽체와 기둥 자국으로 남아 있다.

그런 도시에서 울려 퍼진 희망의 노래라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을까? 여기 아직 살아 있어요, 여기 아직 희망이 있어요, 쌀과 물도 아닌 노래 한 구절이 아직 백신도 치료약도 찾지 못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짧은 위안이 되었다. 그들의 발코니마다 매달린 ‘모두 괜찮을 거야 Andrà Tutto Bene’라는 대책 없이 마냥 순진해 보이는 글귀가 또 사람들에게는 힘이 된다. 그러고 보면 아무런 약효도 없는 음악이 사람에게는 참 큰 위로다. 우리가 진동과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공연이 중단된 베를린 필하모닉이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세계적인 공연단체들도 온라인으로 무료 영상을 공개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평온이 치료의 절반이며 인내심이 치유를 향한 첫걸음”이라던 중세 아랍의 의사 이븐 시나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하루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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