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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내 영화 왜 못 올리냐” 휘발유통 들고 문공부 뛰어들어간 풍운아

입력
2020.03.28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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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충무로의 불도저’ 정진우 감독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정진우 감독과 배우 강수연이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22세에 데뷔한 정 감독은 여러 흥행작을 내놓으면서도 국제영화제에 진출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해 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진우 감독과 배우 강수연이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22세에 데뷔한 정 감독은 여러 흥행작을 내놓으면서도 국제영화제에 진출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해 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진우(82) 감독의 영화적 우상은 명감독이자 배우이기도 한 오슨 웰스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경기 김포에 살던 그는 종종 버스를 타고 영등포 영보극장에서 집으로 가곤 했는데, 캐럴 리드 감독의 ‘제3의 사나이’(1949)에서 열연하는 웰스의 박력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와 같이 “배우도 하고, 감독도 하고, 제작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결심은 고집스럽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으로 온갖 부침을 겪었던 풍운아 웰스처럼, 본인 또한 파란만장한 영화인생을 보내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 감독은 중앙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중앙대는 당대의 인기배우 최무룡이나 극작가 임희재를 배출한 학교였고, 재학 시절 정 감독은 연극 활동에 몰두하면서 학과 선배 최무룡으로부터 많은 도움과 영향을 받았다.

연기보다 제작과 연출에 뜻을 두었던 최무룡이 제작부 일을 맡기고자 부른 것이 정 감독의 첫 충무로 경력이 되었다.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1956)에 참여하면서 영화계 인맥을 쌓게 된 정 감독은 다음 작품인 ‘잃어버린 청춘’(1957)에서는 배우로 김승호와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 필름(편집하기 이전 필름)을 보면서 자신에겐 배우로서의 존재감이 없다고 생각한 정 감독은 대신, 영화감독의 길에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연출가로서의 내공을 쌓기 위해 그는 닥치는 대로 일하며 충무로를 종횡무진 했다. ‘장미는 슬프다’(1958)의 촬영부로 들어간 후 ‘화심’(1958), ‘그 밤이 다시오면’(1958) 등에서 촬영조수를 하고, ‘추억의 목걸이’(1959)에서 조감독을 했다. 그 외에도 제작, 조명과 소품 등 영화에 관련한 모든 분야를 섭렵하여 부지런하고 유능한 인재로 주목을 받았다.

영화 '초우'(1966)는 정진우 감독 초기 작품으로 정 감독이 멜로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초우'(1966)는 정진우 감독 초기 작품으로 정 감독이 멜로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준다.

 

 ◇촬영 연출 등 두루 경험한 노력파 

정창화 감독의 문하에 들어간 정 감독은 조감독 겸 제작부장을 지내며 ‘지평선’ ‘장희빈’(1961), ‘칠공주’(1962)와 ‘대지의 지배자’(1963)에서 임권택 감독과 함께 일했다. 부단한 노력파였던 그에게 감독 데뷔의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조감독 시절부터 면식을 익힌 제작자 정진모의 권유로 ‘외아들’(1963)의 메가폰을 쥐었을 때 그의 나이는 22세. 당시 최연소 감독 데뷔였다. 최무룡ㆍ김지미 부부, 김석훈과 황정순 등 쟁쟁한 배우들을 기용한 이 작품의 첫 시나리오는 일본 유명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외아들’(1936)을 표절한 것이었다.

지인으로부터 사실을 듣고 이대로 만들 순 없다고 생각한 정 감독은 캐스팅은 유지하되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갈아엎었다. 8남매를 키우면서 갖은 고생을 겪었던 어머니의 삶에서 모티브를 얻어 내용을 다시 쓴 이 영화는 국제극장에서 7만 관객을 모으는 준수한 흥행으로 영화감독 정진우의 앞길을 열었다.

신성일과 엄앵란 커플이 맺어지는 계기가 된 두 번째 영화 ‘배신’(1964)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정 감독은 충무로의 인기 감독으로 자리잡는다. 국도극장에서는 “무슨 이런 영화가 다 있느냐”며 거절당했던 ‘배신’은 첫 상영일에 전회 매진되었고 마지막 상영일까지 거듭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서울 관객 10만명이 들었다.

평단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감독인’ 정진우의 연출력을 두고 ‘조숙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벌써 중견급 감독들과 맞서 손색없는 실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경향신문 1964년 2월 3일자)고 영화를 호평했다.

젊은 감독 정진우는 ‘국경 아닌 국경선’(1964)에서 여러모로 야심찬 시도를 하게 된다. 컴퓨터그래픽도 없었던 시절,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우게 된 두 형제 배역을 최무룡에게 1인 2역으로 맡긴 정진우는 필름 조리개의 절반을 열어 한 번 연기를 찍고, 다음엔 반대편 절반을 열어 다시 찍는 식으로 같은 배우가 두 사람 몫의 연기를 하는 특수효과를 실험했다(이 장면의 모티브는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연의 ‘코르시카의 형제’(1941)에서 얻었다고 한다).

맹목적인 반공영화와는 결이 다른 작품을 찍고자 했던 의도는 ‘휴전선이 있으면 있었지 국경선이 어디 있냐’고 트집을 잡혀 정 감독은 일주일간 중앙정보부에 잡혀있어야 했다. 이때 주연배우 김지미가 국방부 장관에게 청원하면서 중앙정보부(중정)에서 시사회를 갖게 되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김형욱 당시 중정부장의 한 마디가 결론을 지었다. “이거 어떤 놈이 빨갱이 영화라고 그랬어!”

‘국경 없는 국경선’은 일사천리로 검열을 통과, 추석에 맞춰 개봉할 수 있었고, 이 작품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 감독은 또 다른 전쟁영화인 ‘8240 K.L.O’(1966)를 작업하게 된다.

배우 고은아의 데뷔작 ‘란의 비가’(1965),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을 원작 삼은 ‘춘희’(1967)로 멜로 드라마에 일가견을 보인 정 감독은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의 정체를 감추고 신분상승을 꾀하다가 좌절하는 이야기를 그린 ‘초우’(1966)를 내놓는다.

“망해도 좋다”고 작심하고 시적인 영상문법을 추구한 ‘초우’는 “대사나 이런 거 필요 없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영화’(중략) 카메라에 의해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씨네포엠(Cine-poem)의 장을 열며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이러한 영화적 실험은 다음 작품인 ‘초연’(1966)에서 더욱 완숙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신성일이 “그 해 1966년에만 ‘초연’, ‘하숙생’, ‘악인시대’ 등 다작을 그와 함께 찍으며 무려 22일간 잠 못 자고 촬영하는 정진우 감독을 보았다”(지승호 인터뷰집, ‘청춘은 맨발이다’) 할 만큼 다작하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고통받는 여성의 삶을 즐겨 다룬 정 감독의 작풍은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자녀목’(1984)로까지 이어진다.

정진우 감독은 영화 '섬개구리 만세'(1972)로 한국 영화 최초로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다. 우진필름 제공
정진우 감독은 영화 '섬개구리 만세'(1972)로 한국 영화 최초로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다. 우진필름 제공
정진우(카메라 뒤 선글래스 쓴 이) 감독이 1978년 국내 최초 완전 동시녹음으로 제작된 '율곡과 신사임당' 촬영 현장에서 연출 지시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진우(카메라 뒤 선글래스 쓴 이) 감독이 1978년 국내 최초 완전 동시녹음으로 제작된 '율곡과 신사임당' 촬영 현장에서 연출 지시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제영화제 진출에도 앞장 

‘폭로’(1968)의 제작과정은 실로 험난했다. 정치깡패의 암투와 사건을 취재하는 여기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정치깡패 이정재의 실화를 각색한 탓에 촬영과정에서 협박을 받기도 했고, 문공부의 지적에 따라 인물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바꿨음에도 반려되기를 거듭했다.

이에 격분한 정 감독은 난로로 난방을 하던 문공부 사무실 건물 2층으로 뛰어 들어가 휘발유통 뚜껑을 열고 외쳤다 “나, 분신자살 하러 왔다. 모두 무릎 꿇어!” 아연실색한 문공부 측에서는 20분을 잘라내고 나서 영화를 통과시켜주었고 검열로 망신창이가 되었지만 ‘폭로’는 새해 극장가 흥행 1위를 찍게 된다.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1982) 또한 검열 시비에 걸렸는데 무지개가 뜨는 원래의 마지막 장면이 북한과 인접한 연평도 배경이라 ‘북한이 낙원’이라 암시하는 것 아니냐는 어처구니없는 핑계로 통편집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하지만 정 감독은 기죽지 않았다. ‘우리 영화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향해 나가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고 각오를 다지며 1968년 영화사 우진필름을 출범시켰다. 이청준 소설 원작의 문예영화 ‘석화촌’(1972)을 발표해 제9회 청룡영화상과 제16회 부일영화상에서 작품상을 받았고, 섬마을 분교 소년 농구팀의 전국대회 진출을 그린 ‘섬개구리 만세’(1972)로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잔혹사를 소재로 한 ‘자녀목’은 제1회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세계 30대 예술영화’에 꼽혔고 제4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 특별 초청됐다. 이 작품이 서구 평론가들로부터 주목 받아 마찬가지로 한국적 토속미를 그린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1987)가 이듬해 여우주연상을 받는데 디딤돌이 된다.

정진우 감독의 영화 '자녀목'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 특별 초청돼 상영됐다. 우진필름 제공
정진우 감독의 영화 '자녀목'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 특별 초청돼 상영됐다. 우진필름 제공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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