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으로 관심 폭발…이용자 정보 공개 안 하는 SNS의 ‘스위스은행’
억만장자 파벨 두로프 형제, 2013년 러시아 권력기관 감시 피해 만들어
미성년자를 포함 여성들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한 뒤 텔레그램을 통해 유포한 ‘n번방 사건’.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한데요. 가해자들이 플랫폼으로 활용한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 측의 수사 협조를 두고 관심이 모이고 있습니다. 텔레그램의 철저한 ‘개인 프라이버시 보장 정책’ 때문입니다. 회원이 범죄자라도 적용되는 정책이죠.
‘n번방 사건’에 연루된 운영자뿐만 아니라 불법 영상을 시청한 텔레그램 회원 등 이들의 신속한 검거를 위해서는 텔레그램 측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텔레그램은 개인 인적 사항 제공에는 비협조적입니다. 그게 곧 이 메신저의 존재 가치이기 때문인데요. 경찰청 관계자는 지난 23일 언론 브리핑에서 “텔레그램에 불법 촬영물을 삭제해달라는 이메일을 보내면 2~3일 뒤에 해당 영상이 삭제되지만, 게시자 인적 사항을 제공해달라는 요청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며 “전 세계 수사기관이 요청해도 반응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텔레그램은 카카오톡, 밴드 등 다른 메신저에 비해 보안이 잘 된다는 인식이 있는데요. 1934년 스위스가 자국 은행이 금융소비자의 신원을 노출시키는 것을 범죄로 규정한 이후, 전 세계의 조세피난처가 된 것처럼 모든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암호화되고 비밀대화 기능을 사용하면 상대방이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해당 메시지가 사라지는 텔레그램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신저상의 ‘스위스 은행’로도 비유됩니다.
만든 자를 알아야 이유가 보이는 법, 텔레그램을 개발한 창업자 파벨 두로프가 이번 사건으로 다시 관심 받는 이유입니다. 그는 누구며, 텔레그램을 만든 이유는 뭘까요?
1984년생인 두로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마크 저커버그가 개발한 페이스북에 영향을 받아 SNS를 만들게 되는데요. 두로프는 프로그래머인 형 니콜라이 두로프를 CTO(최고기술책임자) 자리에 앉히고, 2006년 9월 SNS 브콘탁테(VKㆍVkontakte)를 선보이게 됩니다. VK는 출시 2년 만인 2008년 러시아 최대의 SNS로 자리매김합니다. VK의 성공으로 두로프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는데요. 이후 러시아 정부와 대립을 겪게 됩니다.
2012년 러시아 대선 직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규탄하는 반정부 시위가 잇따랐는데, 이때 시위대의 정보 교환 창구가 된 게 VK였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시위대의 인적 사항 등을 VK 측에 요구했지만 두로프는 이를 공개하기는커녕, 러시아 정부의 시위대 개인 정보 요구 협조 공문을 자신의 VK 페이지에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2014년 푸에르토리코 동쪽에 위치한 카리브해 국가 세인트키츠앤드네비스로 떠나 25만 달러(약 3억687만원)를 기부하고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두로프는 러시아를 떠나기 전, VK에서 주주총회 의결을 거쳐 퇴진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이 당시 정치적 외압에 의해 VK에서 물러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두로프는 2013년 8월, 형 니콜라이와 함께 텔레그램을 출시하게 되는데요. 시기를 보면 아직 러시아를 떠나기 전이죠. VK가 정부와 마찰을 빚기 시작할 때쯤, 이미 텔레그램 개발을 염두에 둔 겁니다.
권력기관과의 갈등을 빚는데다 권력 기관의 서슬 퍼런 검열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이들 형제가 만든 메신저가 바로 텔레그램인 거죠. 두로프는 ‘검열 받지 않을 자유’, ‘개인 프라이버시 보장 정책’을 텔레그램의 최우선 가치로 삼았는데요. 2018년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영화 ‘브레이브하트’ 대사를 인용, ‘그들은 우리의 인터넷 IP는 빼앗아도 자유는 못 빼앗는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또 2016년 2월 코리아타임즈 인터뷰에서 한국의 테러방지법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그는 “테러 방지를 위해 테러인물을 감시ㆍ관리할 수 있는 법은 조지오웰 소설 ‘1984’의 ‘빅브라더’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전 세계 수사기관의 정보 제공 요청에도 텔레그램이 응하지 않을 수 있는 데는 자본에서 자유롭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텔레그램은 비영리를 지향합니다. VK 성공으로 억만장자 대열에 들어선 두로프는 자신이 보유한 자금으로 텔레그램을 운영하다 투자자들로부터 총 17억 달러(약 2조986억원)에 달하는 텔레그램 운영 자금을 투자 받기도 했습니다.
현재 국내 누리꾼 관심은 텔레그램이 한국 수사기관의 협조 요청에 응할지 여부인데요. 협조를 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 짓기에도 이릅니다. 국내 ‘n번방 사건’은 아동 성범죄라는 전 세계가 강력하게 단속하는 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전형진 강원청 사이버수사대장도 25일 오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다른 지방 경찰청에서 텔레그램 본사하고 접촉을 했다라는 얘기를 제가 전해 들었다”며 “정확한 어떤 메시지가 오고 갔는지는 확인을 해봐야 되겠지만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저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국내에서도 텔레그램 탈퇴 운동이 확산하는 모양새입니다. 트위터 계정도 생겼는데, ‘n번방 텔레그램 탈퇴 총공’은 텔레그램이 경찰 수사에 협조해야 한다면서 25일과 오는 29일 밤 9시, 두 차례에 걸쳐 텔레그램을 동시 탈퇴하는 방식으로 압박하자는 공지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면 두로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보호하려는 프라이버시는 누구를 위한 건가요?”
박민정 기자 mjm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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