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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화의 정중한 답장] 그리고, 기적을 본다

입력
2020.03.25 18:00
수정
2020.03.25 18:30
25면
0 0
서울 중구 덕수궁에 핀 진달래 꽃. 뉴시스
서울 중구 덕수궁에 핀 진달래 꽃. 뉴시스

예외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도 어제와 똑같다. 아침에는 거실 창 블라인드를 걷으며 창문보다 내가 먼저 햇살 온기에 따뜻해졌다. 한 시간 전에는 후배와 통화하며 그 목소리가 익숙한 것이 새로워 목이 멨고, 십 분 전에는 분리수거를 하러 나간 길에 누군가 아파트 나무를 사진 찍는 모습에 가슴이 찡했다. 푸른 잎이 돋아나고 있는 나무를 자식 안듯이 안고 있는 할머니를 볼 때는 가슴에서 반가운 무엇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랬는데 지금 뉴스를 보다가 뉴스 말미 앵커의 짧은 클로징에 기어코 눈물이 핑 돈다.

“그래도, 봄은 오고 있습니다!”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2020년, 사람들은 봄을 말하며 운다. 나뭇잎이 연둣빛으로 물들고 있다며 울먹이고, 걸치고 나온 겉옷이 무겁다며 목소리가 젖고, 개나리가 피었다며 기쁨의 비명을 지른다. 하늘이 너무 깨끗해 머리카락 숫자까지 비칠 것 같다며 숨차하고, 새들의 날갯짓에서 피가 도는 온기가 느껴진다며 박수를 친다.

그래도, 오고 있는 봄 때문이다.

그래도! 코로나19라는 신종 바이러스의 역습으로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는 이런 중에도, 인내의 한계를 넘어가는 불안과 두려움과 분노 속에서도, 그것을 밀치며 우리 곁으로 오고 있는 봄, 때문이다. 극적인 신비, 극적인 아름다움, 극적인 고마움이 아닐 수 없다. 사전 선전포고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들이닥친 코로나19! 몇 달째 청각을 지배하는 불길한 숫자들이 자고 나면 주인 없는 묘의 비문처럼 화면에 뜨는 세상,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 퍼져나간 대륙과 나라 이름들의 숫자가 읽어내기도 버겁게 올라가는데, 그렇게 온 세계가 성경 속 노아의 방주를 꿈꾸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공포의 주인공과 싸우는데, 그래도! 봄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적을 본다.

당연했던 것이, 당연해서 솜털 하나 흔드는 감동도 안 되던 것이, 기대 못한 기쁨이 되고 엎드려 맞아도 부족한 선물이 되는 것. 지척에 두고도 별다른 정을 못 느꼈던 인연들이 뜸하게 주고받는 전화 속 목소리만으로도 왈칵왈칵 그리운 이름이 되는 것. 흔하게 습관처럼 했던 기도가 뜨겁고 절실한 간구가 되는 것. 그 기도 속에 원래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마음속 몇몇이 자꾸자꾸 그 수가 불어나 온 세계 사람이 된 것. 꽃이 피고 나무에 물오르는 것이 진짜 너무 고마운, 고맙다는 말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돼서 더 아름다운, 2020년 봄이 왔다.

마주보지 말라고 한다. 손도 잡지 말라고 하고 가능한 서로 말도 하지 말라고 한다. 여럿이서 밥 먹는 것도 피하고, 틈 날 때마다 삼십 초 이상 손을 씻으라고 한다. 외출할 땐 마스크를 쓰고 사람 사이에 2m의 거리를 두라고 한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풍경이다. 눈 감고도 다 안다고 믿어 왔던 세상이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세상 같다. 각 학교의 개학이 연기되고, 일상을 지배했던 모든 시간표가 멈췄다. 한적해진 거리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우울한 눈빛으로 빠른 걸음을 걷고 집집마다 현관은 더욱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힌다.

자고 나면 세상의 나라들이 호명되며 그 나라의 확진자와 죽은 이들이 숫자로 발표된다. 집단감염을 일으킨 장소와 건물 앞에서 판도라의 상자처럼 위태로운 마이크를 잡고 보도하는 기자들, 자식 같아서 형제 같아서 친구 같아서 한 마디도 흘려 듣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희대의 전염병과 싸우고 있다. 매일 묻는 안부 전화가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매일이 절벽에 선 것 같은 이런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무언가 따뜻하게 손에 잡히는 것 같은 이것은 무엇일까? 가슴에서 도란도란 거리며 깨어나는 이것은 분명히 슬픔과는 다르다.

뜻밖의 해후 때문이다. 소중한 줄 모르고 지녀 왔던 모든 것들, 옆에 있는지도 모르게 무심했던 모든 것들과의 만남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것들이 얼마나 눈부신 축복이었는지, 때 되면 피고 지는 꽃들이 얼마나 큰 생명의 두드림이었는지, 시간만 내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인연들이 얼마나 천군만마 같은 힘이었는지, 이제야 보고 만지고 느끼며 알게 됐기 때문이다. 해외에 나가 있는 자국민을 데려오기 위해 전세기를 띄우는 뉴스를 보던 날, 남남인 그들의 귀국이지만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TV에서 완쾌 숫자가 뜰 때는 피붙이처럼 환호하며 진심으로 기뻤다. 코로나19와 맞서는 시간을 살면서 사람들은 진짜 정을 냈고 진짜로 선해졌다.

기적은 전에 없던 것들을 데려오거나, 처음 만나는 기이한 사건이거나, 한계를 넘어선 엄청난 사건이라고 믿어 왔다. 그래서 그동안 한 번도 못 만나본 신비한 무엇으로 언어 사전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라고 밀쳐 냈었다. 그런데 지금 두 팔을 브이 자로 높이 벌리고 온 가슴 열어 어느 때보다도 맑은 눈으로 기적을 본다.

2020년 봄이다. 개나리와 매화가 피고 라일락이 꽃잎을 벌리는 봄이다. 코로나19보다 힘센 봄이 왔다. 가혹하게 아름다운 기적의 현장에 우리가 있다.

서석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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