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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讀古典] 불청(不聽)과 경청(傾聽)

입력
2020.03.23 18:00
수정
2020.03.23 18:39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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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평소에는 홀대하지만 큰일이 닥치면 전문가를 찾을 수밖에 없다. 아프면 명의를 찾아야 하고 전시에는 전략가의 말을 들어야 한다. 목하 한국도 일종의 전시 상태이다. 되새길 만한 고사 하나를 소개한다. 배수진(背水陣)의 명장 한신(韓信)의 이야기다. 여기서 필자는 배수진의 광휘(光輝)에 가려진 한 인물을 주목하고 싶다.

BC 204년, 한신이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형 땅에서 조나라를 치려고 했다. 조나라 왕과 대장 진여는 한신이 군사를 정형 땅 어귀에 집결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좌거(李左車)가 진여에게 한신이 원정(遠征)인 점을 지적하며 이렇게 건의 했다.

“정형은 길이 험해 두 대의 수레가 함께 지나갈 수 없으며 기병도 줄을 지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갈 길이 수백 리나 됩니다. 그러므로 형세로 보아 군량미는 반드시 그 후방에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기습할 병사 3만명을 주십시오. 지름길로 가서 그들의 군량미 수송을 끊어 놓겠습니다. 장군은 물길을 깊이 파고 방어벽을 높이 쌓고 진영을 굳게 지키며 싸우지 마십시오. 그러면 한신은 전진해 싸울 수도 없고, 후퇴하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때 아군이 적의 뒤를 끊고 들판에서 약탈할 만한 식량을 치워 버리면, 열흘 안에 적장의 머리를 바칠 수 있습니다. 장군은 저의 계책을 심사숙고 해 주십시오. 그리하지 않으면 반드시 적장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런데 진여는 유자(儒者)였다. 언제나 정의를 강조할 뿐 작전을 궁리하거나 기발한 계책을 쓰지 않았기에 이렇게 말했다. “병법에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 배가 되면 싸우라고 했소. 지금 한신의 병력이 수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천에 지나지 않소. 천리 먼 곳에 왔으니 벌써 매우 지쳤을 것이오. 이런 적을 피하고 공격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대군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싸우겠소? 그렇게 되면 제후들이 우리를 비겁하게 여기고 쉽게 쳐들어올 것이오.” 결국 이좌거의 계책을 듣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듣고 한신은 기뻐하며 행동을 개시한다. 전쟁은 싱겁게 끝났다. 배수진을 사용한 한신의 대승이었다. 진여의 목을 베고, 조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이때 한신은 전군에 이좌거를 사로잡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했다. 이좌거가 끌려오자 한신은 그의 결박을 풀어주고 상석인 동향으로 자리를 마련해 앉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스승을 모시듯 서쪽을 향해 마주 대하며 앞으로의 계책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했다. 이좌거가 거절하며 말한다. “듣건대, 패장은 용기를 말할 수 없고(敗軍之將不可以言勇), 망국의 벼슬아치는 나라의 살길을 말할 수 없다(亡國之大夫不可以圖存)고 했소. 나는 패망한 나라의 포로인데 어찌 큰일을 말할 자격이 있겠소.”

한신이 말했다. “제가 들으니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는 우나라가 망했지만, 진나라에 있을 때에는 진나라가 패자(覇者)가 되었다’고 합니다. 백리해가 우에 있을 때에는 어리석었다가 진에 있을 때에는 지혜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임금이 그를 등용했는지 않았는지, 그의 계책을 받아들였는지 않았는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聽與不聽). 만약 진여가 선생의 계책을 받아들였다면 저는 벌써 포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조나라가 선생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선생을 모실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좌거의 정확한 분석도 귀를 닫은 사람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진여는 ‘인의(仁義)’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칭송을 듣기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명예욕에 눈이 가려 탁월한 전략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반면 이좌거의 태도는 다르다. 그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패장이기에 자신은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패전의 책임을 감수하는 태도에 진정한 무인의 기품이 느껴진다. 실패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바람직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근자에 정부 여당과 일부 언론에서 우리나라가 방역 모범 국가라고 자화자찬하는 모습을 보았다. 외신에 몇 줄 나온 것을 거듭 인용하는 태도를 보며 씁쓸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사실 우리가 내세울 실력은 방역 능력이 아니라 진단 역량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지 말자. 한 장의 마스크를 사나흘 써야 하는 상황은 여전하다. 대만과 싱가포르 등의 감염병 대처는 우리보다 월등하지만 부산을 떨지 않는다.

다시 주목받는 고전,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는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더클래식, 2017)

지금은 안심도 할 수 없고 방심도 할 수 없다. 해답은 교의(敎義)나 구호가 아니라 관찰에서 나온다. 문제가 없다는 사람에게는 답도 없다.

박성진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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