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은 현지인들로 포화 상태 한국 교민들은 접수조차 불가
“상점 문 닫아 생필품 못 구해… 하루종일 항공권 예약창만 클릭”
필리핀에 거주하는 우리 교민들의 근심이 깊어지고 있다. 필리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치명률이 한국의 10배에 달하는 상황. 그러자 ‘필리핀의 트럼프’를 자처하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모든 외국인은 72시간 안에 루손섬을 떠나라”고 기습 발표를 했다. 다행히 18일 ‘출국 데드라인’은 철회됐지만 귀국 교통편은 태부족이고, 현지 정부의 배려도 없어 교민들은 타지에서 홀로 ‘생존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날 필리핀 정부가 전격 봉쇄한 수도 마닐라의 교민들 말을 종합하면 외국인에 대한 코로나19 감염 방지책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한다. 지금까지 필리핀에서는 코로나19 확진 환자 202명과 사망자 17명이 나왔으나, 마닐라를 비롯한 루손섬 내 병원은 자국민 감염 의심자만으로도 이미 포화 상태다. 필리핀 거주 8년 차인 교민 A씨는 “지난주 아들이 열이 나 병원을 찾았더니 필리핀인이 아니면 치료가 불가하다고 해 접수조차 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교민들은 앞으로 상황이 더 악화할 것으로 우려한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전날 6개월 동안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육해상 이동을 전면 차단한 터라 가뜩이나 열악한 의료서비스 자체가 멈춰 설 공산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닐라에서 12년째 한식당을 운영 중인 교민 B씨는 “식당은 당연히 문을 닫았고 공급망도 붕괴돼 생필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며 “마닐라 도심은 사람 하나 볼 수 없는, 말 그대로 ‘좀비들의 공간’이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우리 정부와 항공사들도 애는 쓰고 있다. 문제는 루손섬의 교민 수(최대 6만명)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가장 큰 항공기로 하루 4회 마닐라행 항공편 증설을 논의 중이지만 교민회가 1만여명으로 추산하는 귀국 수요를 따라 잡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교민들 입장에선 생사가 걸린 ‘복불복’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내 기업의 마닐라 주재원으로 근무 중인 교민 C씨는 “최대 1,500명을 수용하는 귀국 비행편이 마련됐다고 들었지만 한 자리도 예약하지 못했다”며 “하루 종일 항공권 예약창만 클릭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앞서 필리핀 범정부 태스크포스(IATF)는 전날 밤 긴급 회의를 열고 외국인과 필리핀 국적 해외근로자 등에 대해 시간 제한 없이 나라를 떠날 수 있도록 조치했다. 16일 외국인들의 출국 허용을 72시간으로 제한해 각국 정부의 거센 항의를 받자 봉쇄 대책을 다소 완화한 것이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측은 “필리핀 정부의 출입국 조치가 수시로 바뀌고 있어 대사관 홈페이지 등에서 새로운 정보를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우리 외교부 고위당국자도 “이날까지 필리핀 출국을 원하는 교민이 1,200명 정도로 파악됐으나 상황이 나빠지면 희망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며 “항공편 증편을 강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아직까지 임시항공편 투입은 검토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정부는 비행기편을 확보해 코로나19 확산으로 남미 에콰도르에 발이 묶은 국민을 이송할 방침이다. 외교부에 따르면 에콰도르에서 현지 대사관이 전세기를 확보해 오는 19일 50여명을 태워 미국으로 출국시킬 예정이다. 탑승할 국민들은 코이카 봉사단원 등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미국 플로리다로 이동한 뒤 개별적으로 귀국길에 오를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대사관은 전날 현지 교민들을 대상으로 전세기 확보 사실을 문자로 안내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next88@hankookilbo.com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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