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노포기행] “국회에 걸린 대한민국 임시헌장 표구, 가장 큰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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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 노포기행] “국회에 걸린 대한민국 임시헌장 표구, 가장 큰 보람”

입력
2020.04.04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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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전북 전주 고석산방

초등 6학년 때 어머니 여의고 큰누나 집 기거하며 표구 배워

57년 외길, 거장들 작품 맡아…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도 전담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표구사 '고석산방'. 김대현 대표는 1976년 인근에서 개업한 뒤 1981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조선시대 전북과 전남, 제주를 관할하던 전라감영 복원 작업이 한창인 전북 전주시 완산구 옛 전북도청사 부지 주변은 예술인들이 왕래가 잦아 ‘예술인 거리’로 불렸다. 지금은 쇠락했지만 띄엄띄엄 눈에 띄는 화랑과 표구사가 옛 영화의 흔적들이다.

전라감영지 바로 건너 한옥마을 가는 길에 허름한 뒷골목으로 접어들면 김대현(75)씨가 45년째 운영하는 표구사 ‘고석산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명한 서예가 하석(何石) 박원규(73) 선생이 6년 전 직접 써 준 특이한 글씨체의 ‘고석산방’ 간판 덕분이다. 하석은 1970년대 전주에서 작품활동 당시 김 대표에게 표구도 맡기고 서예도 가르치면서 ‘고석(固石)’이라는 아호까지 지어 준 막역한 벗이다. 김 대표는 1976년 독립해 개업할 때 이 아호를 넣어 ‘고석산방’이라고 이름 지었다. 하석의 가르침 덕분에 1982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2일 문을 밀고 들어가니 김 대표와 부인 최순옥(68)씨가 반갑게 맞는다. “예년 같으면 각종 전시회 작품 하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쁠 시기인데 코로나 때문에 한가해 편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됐네요.” 벽에는 화랑처럼 서화 작품들이 다닥다닥 걸려 있고 작업대에는 각종 도구와 표구할 작품들이 켜켜이 놓여있다.

김대현 대표가 한지에 풀을 바르는 배접작업을 하고 있다.

김 대표는 앉자마자 문외한인 기자에게 표구의 유래와 용어, 작업 과정 등 각종 자료들을 풀어놓으며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표구는 일제 강점기 일본 용어 ‘호구(表具)’를 그대로 받아 사용해 보편화된 것이고, 조선시대에는 장황(粧潢) 또는 배첩(褙貼)으로 불리기도 했다. 배첩을 풀이해 보면 ‘등(背)에 옷(衣)을 입힌다(貼)’는 의미다. 표구는 서예나 그림에 종이와 비단을 붙여 용도에 따라 족자, 액자, 병풍 등의 형태로 장식해 작품의 심미성과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인 서화처리방법이다. “표구는 서화에 어울리는 제대로 된 옷을 입히고 생명을 불어 넣는 일입니다. 종이나 비단을 발라 장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완성시키는 창작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훼손된 작품이나 고서화를 복원하는 작업이죠.”

표구는 한지에 물을 뿌려 활짝 편 다음 한지를 작품에 덧붙이는데 이를 1차 배접(褙接)인 초배(初褙)라고 한다. 작품을 하루 건조시킨 뒤 종이를 한번 더 덧대는 것이 재배(再褙)다. 배접할 때 풀 농도 조절이 아주 중요하다. 진하면 작품이 빳빳해지고 약하면 배접지와 작품 사이가 뜬다. 표구는 훗날 수리 복원까지 고려해 진행한다. 따라서 배접 때 사용하는 풀의 상태가 관건이다. 밀가루를 항아리에 1년 이상 담아 매일 물을 갈아 준 것을 끓여서 칠한다. 오랫동안 물에 담가야 세균의 먹이가 되는 단백질이 제거되고 글루텐 성분만 남아 접착력과 보존력이 향상된다.

배접된 작품을 액자에 넣기 위해서는 사방 여백을 산정해 틀을 제작한다. 예전에는 틀을 직접 만들었으나 지금은 목공소에 맡긴다. 여백은 작품의 미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므로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오직 그의 오랜 경험과 감각에 따른다. 액자의 틀어짐을 방지하고 나무의 진액이 나오는 것은 막기 위해 앞뒤로 한차례 더 배접을 한다. 이어 습도와 기온의 변화에 대비하고 추후 수리복원이 쉽도록 작품 공간 띄우기를 하고, 액자에 작품을 안치하고 사방을 에워싸는 비단색 선정도 전적으로 ‘감’으로 결정한다.

김대현 대표가 부인 최순옥씨와 함께 배접을 하기 위해 서예작품의 가장자리를 재단칼로 자르고 있다.

이처럼 표구작업은 한지에 물을 뿌리고 풀칠하는 배접부터 작품 붙이고, 비단천 입히고 유리 끼우는 작업까지 모든 공정을 서서 하는 수작업인데다 무거운 액자와 병풍을 들고 나르기 때문에 허리와 어깨 통증은 직업병으로 달고 산다. 게다가 길게는 하루 15시간씩 며칠간 일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70대 중반인 그가 지금도 시간 날 때마다 헬스와 수영으로 체력을 다지는 이유다. 김 대표는 지난해 10월 국회의장 공관에 들어가는 대형 병풍 표구 작업 도중 넘어지는 병풍을 잡다가 어깨를 다쳐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그가 표구와 인연을 맺은 건 기구한 가정형편 때문이다. 광주 대인동에서 살던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전주에서 동양자수와 병풍공장을 하던 큰누나 집에 몸을 맡기면서 표구 인생이 시작됐다. 1963년부터 매형이 제작하는 병풍 일을 거들면서 기본적인 표구기술을 터득했다.

부인 최순옥씨가 배접용 풀을 체에 거르고 있다.

1971년 군 제대 후 직업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는 것이라곤 표구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표구사를 하던 넷째 누나 집에서 기술자로 취직해 원목을 켜고 목공예와 배접 등 전반적인 공정을 터득했다. 1973년 결혼했다. 실력이 쌓이고 단골 예술가들이 늘어 나면서 독립을 준비하다 1976년 지금의 점포 인근에 개업했다.

운이 따랐다. 새마을운동 탓에 고서화가 쏟아져 나왔고 대폿집과 구멍가게에도 표구작품 몇 점씩은 장식으로 걸어 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개업이나 집들이 선물로 인기가 많아 작가들도 호황기를 맞았다. 당연히 표구사도 덩달아 전성시대를 누리며 전주에만 50여 곳에 달했다. 그는 “화랑 경기가 뜨면서 전주에서 서울 작가들의 전시회도 빈번히 열려 표구가 밀려드는 바람에 직원도 5, 6명씩 고용했고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정신 없이 일할 수 있어 좋았다”고 회상했다.

솜씨가 입소문을 타면서 석전 황욱(1898~1993), 강암 송성용(1913~1999), 학정 백홍기(1913~1990), 청초 이석우(1928~1987), 희재 문장호(1938~2014), 남천 송수남(1939~2013) 산민 이용(72) 등 유명한 서화와 동양화의 대가들 작품 표구를 맡았다. 이들의 눈에 찬 것은 그의 안목. 서예도 하고 그림도 그릴 줄 알기 때문에 작품을 보는 눈은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윤점용 한국서예협회 이사장은 “김 대표는 장인정신과 기술력, 꼼꼼함을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표구의 중요한 요소인 비단색과 여백의 조화를 잘 맞춘다”며 “재료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서울 광장시장에 가서 최고급 비단과 삼베 등을 구입해 사용하고 고풍스러운 멋을 살려 작품의 가치를 높여 준다”고 평가했다.

석 달 이상 매달려 작업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지난해 4월 국회 로텐더홀 입구에 설치한 뒤 작품 운반에 참여한 30여명과 기념촬영을 했다. 김대현 대표 제공

하지만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부터 2000년으로 접어 들면서 고미술시장의 침체로 표구사업도 사양길로 접어 들었다. 젊은 세대의 외면과 유리액자 선호, 아파트 문화 확산 탓으로 전주시내 표구사는 이제 10곳 정도만 남았다.

지금까지 장인의 자부심을 꿋꿋이 뽐내며 57년 외길을 걷고 있는 데에는 전주에서 2년마다 열리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가 있다. 1997년부터 지난해 12회 대회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전담했다. 본 전시작 100여점의 족자를 표구하는 일로, 비단색만 60여가지를 사용한다. 납품 기일을 맞추기 위해 밤샘작업도 밥 먹듯 해야 하는 일이다. 전문가들을 고용해 3~4개월간 이뤄지는 고된 공정이다.

국회 로텐더홀 입구에 설치된 한국서예협회 윤점용 이사장이 쓴 '대한국민임시헌장' 김대현 대표 제공

그간 쉬운 작업이 없었지만, 가장 고생한 작업으로는 지난해 윤점용 서예협회 이사장의 ‘대한민국 임시헌장’ 표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임시정부 100주년이던 작년 4월 국회의 요청으로 만든 것이다. 국회의사당 본관 로텐더홀 제1회의실 입구에 설치된 이 작품은 가로 760㎝, 세로 270㎝ 크기의 대작이다. 김 대표는 “워낙 커서 풀을 먹은 작품이 너무 무겁고 혹시 찢어지지 않을까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석 달이나 매달렸다”며 “나무틀은 충남 홍성에서 구한 소나무를 두 달간 건조시켜 만들었고, 국회로 옮겨 설치할 때에는 30여명이 힘을 모아야 했다”고 회고했다. TV에서 국회 뉴스가 나올 때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고, 또 자신이 표구한 작품이 전국민이 지켜보는 장소에 걸렸다는 생각을 하면 큰 보람으로 남는다.

종이에 풀칠하고 문지를 때 사용하는 각종 솔.

앞으로 소망은 제자들을 키우는 일이다. 표구 일이 비전이 없고 고된데 반해 벌이로도 시원찮아 직업으로 배우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요즘 취미생활 삼아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가끔 찾아온다고 한다. 전북에서 유일한 문화재 수리기능자인 김 대표는 “표구공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강의와 도제식 교육을 통해 전승할 생각”이라며 “요즘 젊은이들의 외면으로 표구사가 사라질 위기라서 정부가 활성화 대책을 마련 주었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주=글ㆍ사진 최수학 기자 shchoi@hankook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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