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 다시 고개드는 일본 집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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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 다시 고개드는 일본 집단주의

입력
2020.03.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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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본, 다른 일본] <8>다시 읽는 <국화와 칼>

코로나 사태를 대하는 일본 사회와 시민의 대응에서 2차대전 직후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묘사한 집단주의 성향이 감지되고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전시 미국의 눈에 비친 낯선 일본 문화, <국화와 칼>(1946)을 다시 읽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일본 문화 연구서이다. 학문적으로는 허점이 작지 않지만, 서양 사람의 눈에 비친 일본 문화의 특징을 심층적으로 읽어낸 역작임에 틀림없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일본인은 미국이 전력을 다해 싸워 본 상대 중에 가장 낯선 적이다.(The Japanese were the most alien enemy the United States had ever fought in an all-out struggle).”

일본인을 ‘낯선 적’이라고 묘사한 첫 문장이 암시하듯이, 이 책이 씌어진 직접적인 계기는 1940년대 미국과 일본이 맞선 태평양 전쟁이었다. 베네딕트는 미국 정부의 의뢰로 일본 문화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는데, 전시였기 때문에 일본을 직접 방문해 볼 기회가 없었다. 대신 방대한 양의 일본 관련 자료를 검토했고 미국에서 만난 일본인과 장시간 토론했다.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책이 출간된 것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이었다.

태평양 전쟁은 1945년 히로시마에 대한 원폭 투하로 천문학적인 인명 피해를 입은 뒤에야 끝났다. 미군의 입장에서 훨씬 이른 시기에 끝났어야 마땅한 전쟁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찌감치 승기를 잡았고, 몇 번이나 일본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런데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바닥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좀처럼 항복하지 않았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군의 태도는 미군을 크게 당황시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인의 행동을 해명해 달라는 연구 과제가 문화인류학자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서양 사회의 ‘프로토콜’이 통하지 않았던 일본과의 전쟁

전쟁 역시 공유된 ‘프로토콜’을 따르는 커뮤니케이션의 형태이다. 폭력이라는 비문명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자기파괴적이고 유치한 힘겨루기 모드이지만 말이다. 전쟁의 암묵적인 ‘프로토콜’은 상대방에 치명상을 입히면 항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싸움의 목표가 자기 파괴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쪽이 더 강한지 명백한 상황이라면 불필요한 피해를 줄이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이 암묵적인 전제가 번번히 빗나갔다. 수많은 일본 병사들이 목숨을 잃어도, 수도 도쿄가 불바다가 되어도 일본군은 투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패배가 거듭될수록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자. 정신력으로 위기를 극복하자”는 프로파간다가 국민들의 더 큰 지지를 받았다. 정부가 아무리 선전에 능수능란하다고 해도,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맹목적인 지지는 불가사의하게 비추어졌다.

생포된 병사들은 치욕스럽게 포로가 되느니 죽는 게 낫겠다며 목숨을 끊었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일어났다. 그토록 격렬하게 저항했던 일본군 병사가 투항한 뒤에는 난데없이 전향을 선택해, 한때 목숨 받쳐 싸웠던 아군의 정보를 낱낱이 알려주곤 했던 것이다. “나를 죽이시오. 만약 그렇게 해 줄 수 없다면 ‘모범적인 포로’가 되겠소” 라는 일본군 병사의 제안은 미군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소속 의식을 통해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집단주의 문화

<국화와 칼>은 전시 미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일본군의 행동 양식이 동양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한 문화적 습관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일본 문화를 지배하는, 개인의 행복보다 집단의 이해를 우선시하는 집단주의가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집단주의’라는 프레임이 딱히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으나, 지근거리에서 일본 사회를 관찰해 온 필자로서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집단주의에 대한 순응이란, 개인을 버리고 집단에 희생할 것을 강요하는 외부의 힘에 화답하는 것을 뜻한다. 개인의 행복 추구를 중요한 가치로 놓는 시민 사회적 관점에서, 개인의 이타적, 자기억압적 희생을 강요하는 집단주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문화라는 관점에서는, 집단주의가 정반대로 내부적인 동기에 의해 구동된다고도 볼 수 있다. 집단에 대한 충성심 그 자체가 남부끄럽지 않은 삶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남 보기에 당당한 삶을 살고 싶다는 이기적, 자기만족적 동기가 일본의 집단주의를 부양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충성심이라고 해서 다 같은 충성심이 아니다. 집단에 대한 맹세를 지킬 수 없다면 목숨을 끊는 것이 도리이지만, 충성을 맹세할 다른 대상을 발견하는 것도 방법이 된다. 처음부터 충성을 맹세할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충성을 실천하는 자신의 성실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군의 눈에는 일본인 포로의 뒤끝없는 전향이 얼토당토않은 배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일본에 봉사할 수 없게 된 병사에게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집단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야말로 수치스럽지 않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고개를 드는 일본 사회의 집단주의

코로나 바이러스의 ‘팬데믹’ 격랑 속에서, <국화와 칼>에 서술된 일본인 병사의 낯선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세계적인 전염병 유행 속에서 도쿄올림픽 개최를 앞두었다는 어려운 시기에, 기묘한 집단주의가 다시 고개를 드는 듯해 우려스럽다.

일본 정부의 코로나바이러스 대응은 허점투성이로 보인다. 감염자 수가 적다는 것을 근거로 “다른 나라에 비해 잘 막고 있다”는 것이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지만, 허술한 대응책에 대한 지적에는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일본 정부의 무모한 행보는 권력의 속성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오만한 정치적 권력이 파탄을 불러 일으킨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한국 사회도 불과 몇 년 전 대통령 탄핵까지 불러온 권력의 폭거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그보다 불가사의한 것은 나라가 하는 일인 만큼 일단 믿고 견뎌야 한다는 쪽으로 수렴 중인 일본 사회의 반응이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정부의 소극적 대응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지만 대세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유언비어가 나도는 인터넷을 경계해야 한다는 설교가 힘을 받고 있다. 매스 미디어도 정부의 문제를 지적하다가도 “전염병 진단을 열심히 하면 의료 시스템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정당화에 힘을 싣는다. 잇따르는 헛발질에도 불구하고 여론 조사도 정부의 대책을 지지한다.

얼마 전에는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의 손 마사요시(한국에서는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대표가 100만명에게 무료로 코로나바이러스 진단 검사를 제공하겠다는 손 큰 제안을 했다가 “의료 기관에 혼란만 초래한다”는 비난 여론에 철회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미운 털’이 박힌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점, 소셜 미디어에 트윗을 올리는 뜬금없는 고지 방식도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트윗으로 몰려 든 대부분의 비판은 콕 집어 “코로나 진단 검사를 제공하겠다”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향한 것이었다. 기부라는 좋은 뜻보다도, 정부의 방침에 딴지를 거는 듯한 모양새가 문제였다. 결국 논란이 적은 마스크를 기부하는 것으로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의도가 좋아도 나랏일에 토를 달면 안 된다는 집단주의가 승리한 모양새가 되었다.

일본 정부의 전염병 대응에 대해서 누가 당장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결과와는 무관하게 논리성이 결여된 리더십을 감싸려는 집단주의가 위태롭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나와 가족보다 국가를 우선시하겠다는 희생정신이고, 달리 보면 불편한 현실은 보지 않겠다는 무기력함인 듯도 하다. <국화와 칼>이 역설한 일본 문화라는 렌즈를 통해 보자면, 이런 정서의 근저에는 국가에 귀의함으로써 자아 실현을 도모하겠다는 이기심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글로벌한 전염병 시국에 폭주하는 권력과 기묘한 집단주의, 아슬아슬한 결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걱정스럽다.

김경화ㆍ칸다외국어대 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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